19:8-20 흉내

성경을 보면 지금 우리에게서도 그대로 되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기적과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고 택한 자라 할지라도 그 인생이 고난과 고통으로 채워진 그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될 것 같으면 어떻게든 피할 궁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고, 자신을 과시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일들만이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볼 때 본문처럼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행한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11절의 말씀대로 참으로 희한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직접 손으로 안수를 하지 않고, 다만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얹으면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면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바울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나에게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러면서도 바울이 당했던 고난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까? 즉 사도 바울의 인생에서 나에게 해가 되고 손해가 되고 고통이 되고 고난이 되는 모든 것은 걸러지고 다만 득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일만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입니까? 그야말로 자기밖에 보지 않는 철저한 불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길 자체를 사랑합니다. 만약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주님을 좇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후에 자신을 좇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좇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배를 위해 주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적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기적으로 인한 결과에만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기적=병 낫았다, 기적=귀신을 쫓아냈다’ 이처럼 기적의 결과에만 치중하다보니 자신에게서도 기적이 발생하기를 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기적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선포하기 위함이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은 자 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질병에서 놓여났을 뿐이지 죄의 비참과 멸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아무리 기적이 베풀어지고, 기적으로 불치의 병에서 나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 죄의 결과인 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절을 보면 바울의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울의 이름을 높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아니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사도 바울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부르시고 바울을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적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선포하면서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음으로서 어떤 복에 거하게 되는가를 증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에 관심이 없는 무리들은 오직 기적의 결과에만 눈독을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면 같은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무리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러한 무리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3-14절을 보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흉내를 내어서 자신들도 바울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받는 유혹이 뭔가 하면, 저 사람처럼 하면 나도 저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허무는 악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현대 교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간증이 이런 위험 요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증의 대부분은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어지더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결과가 자신에게 있었음을 말하면서,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게 된 과정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를 가져오겠구나’라는 착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어느 기도원에 가서 며칠 동안 어떻게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다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로 쏠리겠습니까? 방법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예화를 사용할 때 어떤 집사가 부자 된 이야기, 어떤 장로가 목사에게 대들다가 불구가 된 이야기, 이런 것들로 교인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그렇게 하면 망하다’는 것으로 교인들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기적도 과정이 기적을 일으키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이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기도가 더 능력이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흉내 내는 신앙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를 향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면서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현대 교회가 많이 하고 있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갈지어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귀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15-16절을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 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이들 악귀에게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악귀에게 당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이런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말한 예수라는 말이 어떤 능력이 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면, 그것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로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결과에만 마음을 두면서 자신도 그와 같은 결과를 일으키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행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해 버리는 악한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큰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고 어떤 결과만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로, 창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든 뭐든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얻어내는 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고,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을 섰다고 해서 능력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라는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자이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도들이 행하는 기적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악귀, 즉 귀신은 말하기를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합니다. 귀신이 예수를 알고 바울을 아는 것은 예수님과 바울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세워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귀신에게 대적자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귀신의 전쟁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귀가 알고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라는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귀신이 두려워하고 쫓겨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그러한 것에 대해 ‘너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웃을 뿐입니다.

귀신이 두려워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귀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싸우는 것입니다. 귀신은 이러한 신자를 알아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까?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내 죄를 담당케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 관계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무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복을 받는 근거도 관계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복은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잘한게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관계에 대한 것은 도외시하고 온통 수단과 방법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흉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세상보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면 여러분은 능력자입니다. 세상에 지지 않고 귀신에게 지지 않는 능력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흉내가 아니라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