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32 반대의 이유

<본문>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사도행전 19:21-32)

<설교>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일들이 등장합니다. 은장색이란 은을 세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4절을 보면 이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데미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고 은감실이란 모조 은신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데메드리오는 아데미라는 여신의 모조 신상을 만들어서 그곳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팔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가 자기 직공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반대하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들이 바울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이유는 25-27절의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는 말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수입에 막대한 지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는 단지 바울이 우리의 수입을 방해한다는 이유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울로 인해서 우리의 업이 천하여지고 여신 아데미가 경홀이 여김을 받는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명목을 자신들의 신앙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반대와 핍박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복음에 대한 반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반대한 것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일 내용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처럼 종교와 종교의 반대와 핍박이 노골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본문과 같은 내용이 실감 있게 다가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메드리오는 종교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자신이 믿는 아데미라는 여신을 지키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데메드리오는 아데미란 여신을 이용해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생업을 위해 아데미는 데메드리오에게는 중요한 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데미란 신을 위해 바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업, 벌이를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생업을 위해 복음을 반대하는 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말을 했었고, 그 말로 인해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생업에 지장을 주게 된 것입니다. 즉 바울의 말로 인해서 아데미 여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은으로 만든 모조 신상 역시 몸에 지니고 있어봐야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늘어감으로 인해서 그들의 일에 지장이 온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온통 자기 생업을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일을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생업을 방해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결사적으로 싸우며 자신의 생업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교회를 자기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여진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를 생업으로 여길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반대하고 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교회가 우상의 소굴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입니다. 교회를 생업으로 여길 때 교회가 성장되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고 헌금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바치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 충성, 헌신, 믿음 등등의 명목을 내걸어서 그들이 하는 행위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는 것이라는 가치를 심어줌으로서 더욱 더 열심히 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때 교회를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한 사람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메드리오처럼 ‘교회를 위해 일하는 우리를 천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맹목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경홀이 여긴다’는 힘을 모아서 반대하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말은, 신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도 나타나질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신을 향한 신앙 역시 사람의 손으로는 만들어 질 수도 없고 나타나 질 수도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손으로 하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신앙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에서 강조하는 봉사, 십일조, 헌금 등등의 모든 것이 허물어질 위험이 있기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생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신을 찾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생업 안에서 이해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가령 소위 교회에서 쓰이는 성구를 만들어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성구를 만드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생업에 가치를 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성구를 만드는 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구를 만든다고 선전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좋은 성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분명 구약의 성전에서 제사할 때 쓰였던 모든 도구들을 지금의 성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결코 거룩하지 않다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말이 과연 성경적이며 복음인가?를 살피려고 하겠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을 하찮은 것으로 평가절하 하는 말에 대해 반대하고 나설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생업을 위함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생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생업은 복음을 드러내고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생업에서 복음을 생각하는 것이 신자이지 복음에서 생업을 생각하는 것은 신자의 바른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온통 생업에 유익을 주는 것으로 선전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복으로 연관지어 말합니다. 생업을 위해 복음을 멀리하고 포기할지언정 복음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겠다는 각오나 가르침을 찾아보기 힘든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이 오히려 교회에서부터 반대되고 있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들을 때 속에서 못마땅한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자기 돈과 자기 손으로 지은 예배당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신이 아니다’는 말을 한다면 그 속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예배당을 신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예배당을 거룩시 하는 것 자체가 곧 예배당을 우상화하는 것임을 말한다면 그 말에 대해 반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 얼마든지 격동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정성, 우리의 생업을 도와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하늘의 것을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결코 세상의 생업을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하늘을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신자입니다.

생업이란 잠시 세상에 머물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업을 내세워서 복음을 반대한다면 취할 것을 버리고 버릴 것을 취하는 무지한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합니다. 따라서 생업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어서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혹 내 자신이 이러한 복음을 반대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