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41 생각 없는 행동

<본문>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행 19:32-41)

<설교>

지난 시간에는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에 대해 반대하고 분노하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바울에 대해 분노한 이유는 바울의 말로 인해서 자신들의 생업에 큰 지장이 발생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바울의 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 바울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이든 자신들의 생계에 지장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생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입니다. 세상은 복음이든 무엇이든 자신들에게 피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 때문에 손해 봤다’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복음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복음이 전파되면 뭔가 그 복음이 자신을 손해되는 쪽으로 끌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32절의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는 구절을 보면 바울에 대해 분노하여 데메드리오와 함께 모인 사람들 중의 태반이 자신이 왜 모였는지도 모른 채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모이게 되었을까요? 사람에게는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모습이 신앙에 얼마나 해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신앙은 군중심리도 집단 분위기도 개입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회는 분위기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분위기를 개선해 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분위기 자체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많음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위기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려서 거기에 동조하다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조건 옳아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분위기에 매료되어 감정이 사로잡히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성령의 주도로 되어지는 것이지 예배 분위기나 기도나 찬송 분위기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믿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어떠한 길을 가는지, 옳은 길을 가는지 틀린 길을 가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에 대해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감정에 같은 생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선동하여 끌어 들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데메드리오의 말을 듣고 ‘과연 옳다’라고 여기고 다같이 바울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울이 말한 말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데메드리오가 바울에 대해 분노하니 함께 분노했고 욕하니까 함께 욕한 것뿐입니다. 즉 바울에 대한 데메드리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누군가를 욕하는 얘기를 할 때 처음에는 조그만 흠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서 아주 죽일 놈이 되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극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고 과연 잘못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생각과 나름대로의 판단도 없이 감정과 분위기에 의해 나도 모르게 악한 자로 내 속에 규정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의 신앙은 역시 집단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34절에 보면 바울에게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서 두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다고 말합니다. 마치 교회에서 집단으로 모여 기도하면서 공중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주여’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주가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또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버리고 다만 ‘주여’라고 외치는 것으로 자신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이며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이 과연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릴 위험이 많습니다. 분명한 기준과 생각이 없다는 것은 결국 감정과 분위기에 의존하며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분명한 생각과 기준이 없이 살아가게 되면, 결국 교회를 나와 있어도 32절의 사람들처럼 내가 왜 여기에 모였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남들이 나오니까 나도 나온 것이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식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위에 서서 타인의 감정과 분위기에 동요되어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진심으로 죽어야 할 죄를 지은 분인가를 따지고 생각하기 보다는 군중심리에 편승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에 의해서 예수가 죽어야 할 죄인인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과연 어떻습니까? 분명한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행동하십니까?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틀린 것인가를 따지고 생각하며 행동하십니까?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쉽게 휩쓸리고 결국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는 잘못됨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까?

35절부터 등장하는 서기장은 바울을 죄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 한 적도 없고 여신을 훼방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도적질 한 적도 없고 에베소의 여신을 훼방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송사할 것이 있거든 정식으로 고소하라고 합니다. 결국 아무 죄도 없는 사도 바울이 자기 생업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 의해 반대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태반이 군중심리에 의해 아무것도 모른 채 바울을 반대하는 자로 나선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로 모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고, 하라고 하니까 싫어하는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