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12 살리는 기적

<본문>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행 20:6-12)

<설교>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행한 기적 중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사도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만이 행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사도들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대할 때마다 ‘놀랍다’ ‘신기하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사도들도 행한 이 기적들이 왜 현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로 멈추고 사도들에게서는 보여지지 않았다면 ‘아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만 하시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도들도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문감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행한 기적이 왜 지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혹시 사도이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같은 사도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한 사도는 그렇지 못한 사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사도를 세워서 능력을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사도를 통해서 계속 증거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적을 행하느냐를 가지고 능력에 차별이나 구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 대로 왜 지금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없는 것입니까? 이점을 생각하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죽은 심령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육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걸린 사람이 병이 나은 기적을 입었다고 한들 그가 다시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썩어 없어질 육신을 가진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세상을 사는 것이 고달프고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가 다시 살았다고 합시다. 과연 다시 산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놀라운 기적을 입었다는 것으로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다시 산들 그가 재벌로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고달프고 힘든 세상의 짐을 가진 자로 살아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산 것이 기쁨일 수 없습니다. 다만 주위에서 놀라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비한 기적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들도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의 의와 피의 은혜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썩어질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놀라운 것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그래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과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놀라운 기적입니까? 분명 후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영생에 대해 별로 놀라워하지를 않습니다. 놀라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찮게 여기는 수준입니다. 육체에 매어 있고 육체를 제일로 여기며 살기 때문에 육체에 득이 되는 것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로 사는 삶이 진심으로 즐겁습니까? 사실 육체를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고달픔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피곤이고 고생인 것을 왜 모르십니까? 육체가 있으니 병이 있습니다. 육체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다툽니다. 돈에 대한 욕망 역시 육체로 인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육체에 무슨 소망을 두고 계십니까?

신자는 육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벗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육체에 모든 관심을 두기 때문에 영원히 산다는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도 전혀 놀라워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절대로 육체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고, 진정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잠깐 생각하면,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설교 시간에 잠자면 안된다’는 경고의 말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교회를 다닐 때 유두고 얘기를 설교시간에 졸면 안된다는 교훈으로 말씀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유두고가 죽은 이유가 바울이 설교할 때 창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진 것에 있기 때문에 설교할 때 졸면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에 걸터 앉은 것 역시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것으로 비유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교할 때 조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목사가 자기 입장에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조는 사람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입장일 뿐, 설교할 때 존 것을 마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7절의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는 구절을 보면 바울이 아주 오랜 시간 설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9절을 보면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떨어진 것으로 말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졸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졸음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생리 현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졸음 마귀라는 것 역시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다만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죽었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 결국 ‘나는 죽지 않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발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두고를 말하면서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설교 시간에 졸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도 유두고가 왜 죽었는가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0절을 보면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생명이 저에게 있다’는 말은 죽은 유두고를 생명이 있는 자로 본다는 뜻입니다. 즉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의 죽음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잠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죽음은 다만 육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장막을 벗고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썩어질 몸 대신에 영원히 썩지 않은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은 자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부활을 믿으며 살고 또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에게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입니다. 유두고가 살아난 기적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생명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영원히 사는 이 기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생의 기적을 누리지를 못하다면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누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육신을 좋은 옷과 보석을 치장하고 가려봐야 썩어질 몸뚱이를 가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속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속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천국이 있기에 그것으로 족하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신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보면서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한 것은, 유두고에게서 생명을 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유두고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두고에게서 생명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분명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여러분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은 죽은 자가 관에서 살아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봐야 여전히 썩어질 육신일 뿐입니다. 참된 기적은 하나님의 생영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붙들어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끌고 가는 것이야 말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죽은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누리면서 십자가 앞에서 세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신자가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