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2:16-21 말세에

신앙생활은 삶의 일부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 일부로 여기신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인 우리의 행동 몇가지를 모아서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모든 것이 곧 신앙으로 살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활과 신앙을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결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몇 개를 모아서 신앙생활로 내세우고 있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만약 자신이 신앙으로 여기는 그 몇 개의 행동에 대해서 부지런하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 신앙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서로 비교하고 누구의 신앙이 더 깊다거나 누구의 신앙이 약하다는 등의 평가를 하게 되는 것 역시 신앙이라고 여기는 몇가지의 행동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신앙생활을 두고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곤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삶 전체인데 어느 일부를 가지고 비교하면서 누가 낫다 못하다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령이 세상에 오신 것 역시 신자로 하여금 삶의 한 부분에 대해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중 한 부분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각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거기 모여 있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보면 우리가 생각할 때 뭔가 특이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극히 평범한 설교이고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트집잡을 것이 뭐겠습니까?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마음을 뜨겁게 하거나 부추기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하자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를 통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거나 열심을 내게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본문은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13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면서 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절)는 말을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 삼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전 9시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대개 오전에 술을 마시지 않고 모든 일과를 마친 오후에 마십니다. 유대인들 역시 오전보다는 오후에 술을 마십니다. 물론 술 중독자라면 오전에도 술을 마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사람의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을 술에 취해서 횡성수설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서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변증하는 설교를 하는데, 요엘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6-18절을 보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세상이 곧 말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만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것으로 세상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의 세상은 말세라는 역사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서 2:28절의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날이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성령이 오심으로서 너희들에게 이르렀으니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구약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방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의 계시를 알리는 방법으로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예언와 꿈과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주어짐으로서 꿈을 꾸고 예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게 된다면 결국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지던 계시가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지금의 시대에서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자녀와 젊은이 노인, 즉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시이기 때문에 목사라고 해서 다로 개별적인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고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으로서 동일한 성령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성령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같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행함에 대한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 행함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같은 성령을 받은 신자는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보면 같이 성경을 보고, 한 사람이 기도하면 같이 기도하게 되는 식의 행동의 통일이 성령이 오신 이유가 아닌 것입니다.

같은 마음은 19-21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시면 남종이나 여종이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언은 곧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언은 단순히 장차 되어질 앞으로의 사건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 되어질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을 하게 하실 때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푼다고 하십니다. 그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확실하게 드러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속에 있음을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으심으로 세상이 곧 어두움인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평화롭고 힘만 쓰면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굳이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 세상이 곧 심판을 받을 어두움인 것을 알게 된다면 성도가 취하고 바랄 것은 구원 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에서 자연히 빛을 찾고 빛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세상을 희망으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삶을 산다면 그는 성령의 마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희망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인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의 같은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소망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성령이 임한 자와 성령이 없는 자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 곧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지만 옛날 이스라엘에 오셔서 죽으신 그분이 지금은 하늘에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과 예수님은 죽인 이 세상이 곧 어둠이고 심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성령 받은 신자이며 구원받은 자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바꿔놓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