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35 흉악한 이리

<본문>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28-35)

<설교>

지난 주일에는 에베소의 장로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삼았다는 말씀을 통해서 과연 교회의 감독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감독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즉 감독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돕기 위해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흉악한 이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흉악한 이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어서 성령이 세운 감독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그러지게 하는 흉악한 이리에 대한 바른 판단을 신자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은석 교회는 흉악한 이리를 물리치고 날마다 말씀이 기준이 되고 중심이 되어진 교회로 굳건히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절을 보면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흉악한 이리가 외부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30절의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라는 구절을 보면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흉악한 이리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흉악한 이리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이리의 모습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반공 교육에 철저했었습니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전봇대마다 공산당을 쳐부수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학교에서 글짓기나 포스터를 그리는 행사를 해도 주제는 언제나 반공이었습니다. 그때 포스터의 그림을 보면 김일성이나 북한군의 얼굴 모습이 이리의 모습이었습니다. 흉악한 얼굴을 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것만 보고 교육을 받았던 저는 북한 사람의 모습은 모두가 짐승처럼 흉악하게 생긴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TV에서 귀순한 북한군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생겼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흉악한 이리라고 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배드릴 때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예배당에 난입해서 소란을 피우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누구나 쉽게 이단으로 규정하는 통일교의 문성명이나 박태선 같은 가짜 기독교인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흉악한 이리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을 하고(고후 11:14), 양의 옷을 입고(마 7:15)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천사를 가장하고 양의 옷을 입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흉악한 이리를 오히려 참된 목자로 착각을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리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함의 기준을 윤리나 도덕적인 행위에 둡니다. 목사에 대한 시각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목사의 목사다움은 그가 외치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에서 목사다움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투가 겸손하고 얼굴 표정이 인자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면 그것을 목사다움의 증거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기준으로 인해서 흉악한 이리에게 속게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목사가 복음만 바르게 외치면 되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순종이 윤리나 도덕적인 겉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는 무엇에서 다릅니까? 마태복음 7:13-15절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특징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것입니다.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하는 힘든 길임을 뜻합니다. 가봐야 손해가 될 뿐이고 힘이 되는 길도 아니기 때문에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싫어하는 꺼려하는 길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말한다면 분명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까지 싫어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좇게 하려는 흉악한 이리는 사람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고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외치지 않는다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문선명이나 박태선처럼 자신이 예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라는 것을 철저히 외치는 것 때문에 참된 선지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믿음의 보상을 가르칩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는 복을 받고 천국에 가면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귀한 것을 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받아 누리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보상을 바란다는 것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교회에서 말씀이 어그러졌다면 그것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교회로 세워지기 보다는 목사를 위하고 사람을 위한 교회로 세워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외친다면, 이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를 위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님을 세우기 위한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인해서 목사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것은 목사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인기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교회 안에서 일어난 흉악한 이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흉악한 이리는 제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마음을 둘 때 이미 우리 자신이 흉악한 이리로 일어서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목사가 어떤 어그러진 말을 해도 그 말을 좇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몫입니다. 잘못된 말을 옳다고 여기고 그 말을 좇는다면 여러분 역시 흉악한 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사람이 외치는 말이 참된 복음인가를 판단하려면 그의 말이 여러분을 어떻게 그리스도로 인도해 가는가를 살피십시오. 오직 예수의 피를 바라보게 하고 그 피를 의지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는 외침이라면 복음이지만 자신의 행위나 열심을 내걸어서 그것으로 보람을 삼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기게 하고 그것을 의지하게 해서 예수께 나아가게 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고 흉악한 이리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아서 잘못되고 어그러진 흉악한 이리의 외침을 제대로 분별하는 신자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