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6-38 울음

<본문>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사도행전 20:36-38)

<설교>

사람의 울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운다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기뻐서 우는 것이 있고, 슬퍼서 우는 것이 있고, 화가 나서 우는 것도 있습니다. 실망과 낙심의 울음이 있고 두려움으로 인한 울음도 있고 감사함으로 인한 울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울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울음은 주로 회개라든가 기도할 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울음이 그 사람의 믿음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고 울음이 그 사람의 진실함을 대변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울음을 두고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운다는 것이 곧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두고 무엇 때문에 울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에베소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크게 울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들의 울음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울음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36-38절)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에베소의 장로들은 단지 사도 바울과의 헤어짐이 아쉬워서 우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즉인간적인 친분관계로 인한 울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에베소에 대한 정성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삼년 동안이나 사도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 에베소의 장로들로서는 사도 바울과의 헤어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38절을 보면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했다는 구절을 보면 그들의 울음에는 사도 바울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다가 떠날 때의 내용이 아니라 이미 떠나 있던 상태에서 잠시 만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울음을 바울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만남과 헤어짐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험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삼년간 함께 하던 사람과 헤어질 때 과연 눈물이 나던가요? 은석교회에서 함께 수년간 신앙생활 하던 형제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서 헤어져야 할 때 눈물이 나던가요? 아마 ‘잘가라’고 웃으면서 악수하고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장로들은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했거나 마음이 여렸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본문은 단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한 울음으로 끝날 뿐일 것이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다른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친한 사람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같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또 다른 관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라는 특이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관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인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 즉 한 몸의 관계일 뿐입니다. 에베소의 장로와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삼년간 함께 지낸 인간의 정리로 만나고 그것 때문에 울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로들의 울음에는 사도 바울에 대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아쉬움과 애통함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바울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만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말을 봐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삼년간 어떤 가르침을 했겠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사람들이 원하는 말, 사람들이 듣고 기분 좋을 말 따위는 하지도 않는 것이 바울입니다. 오히려 죄를 책망하고 어떻게든 에베소 교회를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바울에 대해 운다는 것은 결국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그들이 함께 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장로들에게 권면한 후에 무릎을 꿇고 장로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크게 울었다는 것은 장로들이 사도 바울의 기도에 함께 했음을 뜻합니다. 장로들의 마음이 사도 바울이 기도와 일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기도에 크게 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바울의 기도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울의 목을 안고 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만 가득 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로들의 울음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위해 기도했겠습니까? 에베소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겠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복을 받아 잘 살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다시는 에베소 교회를 방문할 수 없음을 안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면 그것은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에베소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바울의 목을 안고 운다는 것은 단순한 친분 관계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만남이었고 헤어짐이며 바울의 그리스도가 곧 에베소 장로들의 그리스도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로들의 울음은 예수만 전파하는 바울과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그것을 통해서 에베소 장로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가가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 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전부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과 위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다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향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바울의 이 고백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바로 바울의 목을 안고 우는 장로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이 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것을 한쪽에 남겨둔 채 다만 이 말에 대해 감동을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그리스도밖에 몰랐던 바울이 살았던 삶을 뒤따라 가보십시오, 과연 바울의 삶에 자신이 세운 교회를 크게 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바울의 말을 두고 얘기하면 감동을 하는데 바울의 삶을 두고 얘기하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바울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들의 울음은 바울이 권면하고 가르치고 기도한 바를 따라 살겠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울음이 있습니까? 기도하면서 우는 그런 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는 그 마음이 여러분을 애통으로 울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자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바울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어려움을 막아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당할 것을 다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신 바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자임을 알기 때문에 울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과연 이러한 울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울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복음에 대해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울음이 있다는 것은, 힘들어도 그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께도 이러한 울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함께 이러한 울음이 있는 자로 만나고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