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7-26 신자가 싸워야 할 것

<본문>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사도행전 21:17-26)

<설교>

본문에 보면 또 다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의 행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통해서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지 봉사했을 뿐 바울의 봉사로 말미암아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한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수시로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신자는 단지 봉사하는 위치에 있을 뿐 일을 이루는 입장은 아님을 잊는 것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신자의 행위를 서로 비교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능력을 결정짓는 비신앙적인 행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봉사하는 자의 위치에 있을 뿐 일을 이루시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신자는 그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신자는 다만 봉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바울에게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20-21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들에게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이들을 데리고 가서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오해한 것으로 여기고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알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이들의 부탁대로 서원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결례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 하였노라’는 굳은 결심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라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말에 대해 거절을 하면서 ‘나는 죽는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 유대인과의 오해를 풀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타협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점이 오늘 본문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바울의 행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바울을 통해서 진심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일단은 바울이 결례를 행하는 것이 유대인과의 타협을 모색한 것도 아니고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려는 것도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이유로 결례를 행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비신앙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앙과 비신앙의 차이는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있는 어떤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비신앙이 아니며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복음을 기존교회의 행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존교회가 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니까 그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고 복음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결국 기존교회와 반대된 또 다른 교회를 내 속에 세워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답다 교회답지 않다는 것은 제도적인 어떤 의식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존 교회의 제도와 의식을 폐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는 잘못된 것이니까 우리는 십일조를 없애 가지고 교회됨을 증거하겠다는 발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오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서신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결례들을 페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짐을 말했을 뿐이지 율법의 행위를 다 폐하는 것이 신앙이며,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가르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도 행하지 말고 규모도 지키지 말라 한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거침돌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 믿는 자들은 여전히 옛 습관 율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율법이 중요했고 율법을 행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을 행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면 이들은 바울의 말 자체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바울이 결례를 행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즉 할례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할례의 의미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를 행하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역시 이러한 주님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결례의 의미를 아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명하신 결례에서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기에 얼마든지 결례를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의 행위에 이해를 돕는 구절이 고전 9장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같이 되고,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는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행하고 유대인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들의 삶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의 싸움은 율법을 행하지 않고 결례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얻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오해함으로써 기존교회가 행하는 율법적인 것들을 폐하고 공격하는 것을 복음을 아는 자가 행해야 할 싸움이라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요구를 듣고, ‘난 안한다. 죽이려면 죽이라 해라. 난 핍박 받기 위해 온 사람이다’라고 나섰다면,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멋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바울이 자기 싸움에 몰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은 아닌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싸울 것을 명하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제가 그동안 기존교회가 행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었지만, 그것은 기존교회의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기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의식을 믿는 것에 대한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이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아는 자로서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싸움은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무엇인가를 폐하고 없애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거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쓸데없는 것으로 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내 지식을 세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그러나 만약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복을 얻는 길이다’거나 ‘결례를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다’는 것을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분명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할례를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두고 복음이다 아니다라는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거나 할례가 신자된 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내 지식을 세우기 위한 싸움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러한 싸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울이 결례를 행하는 그 마음을 깊이 생각하시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를 세우기를 힘쓰는 신자로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