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7-30 신자의 길

<본문>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사도행전 21:27-30)

<설교>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성도들의 요구대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을 데리고 결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처럼 율법의 의식을 마다하지 않고 행한 것은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행하는 그의 마음에 따른 것이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오해를 풀어서 자신의 복음 사역에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을 얻기 위해 쓸데없는 일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살피면서 성도가 교회에서 취해야 할 마음 자세와 태도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서로의 고집을 주장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세우기 위한 일이라면 나의 주장이나 고집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장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말에 따르는 것이 마치 내가 지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결국 자신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로서 정당한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토록 자신을 양보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결례를 행했으면 여러분은 결과가 어떻게 되기를 원합니까? 분명 유대인들이 바울이 결례를 행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한 것 같다’고 하면서 악수하고 화해하는 분위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되어야 바울이 결례를 행하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을 보면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27-28절을 보면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결례를 행한 바울을 여전히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자로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 사람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보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까지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온 성이 소동하면서 백성들이 달려 나와 바울을 붙들어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는 내용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사울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담대하게 사도로서 행동하는 것에 마음이 갈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참으로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바울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바울이 당하는 상황들은 하나같이 바울에게는 억울할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고 가르친 적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바울을 붙들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에베소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 보고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지레 짐작까지 해버립니다.

저는 만약 제가 바울과 같은 억울함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분명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 애쓰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향한 오해에 대해 전혀 다른 조치를 행하지 않습니다. 붙들 때 그냥 붙들릴 뿐이고, 오해하면 한대로 그냥 있을 뿐입니다. 굳이 설명을 하면서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애쓰지를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바울이 너무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을 보면서 진리에 관심이 없는 세상을 진리를 전하는 자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서 세상은 결코 진리를 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진리를 전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고난입니다. 세상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원하며 그것을 안고 산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타인이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와는 상관없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일단 이러한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가 진리에 관심이 있는 자에 대해 좋은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에게 진리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신을 폭로하기도 하고, 자신이 주장하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노골적으로 진리에 대해 반대하고 공격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진리에 관심이 없는 자가 진리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바울의 가르침은 유대인 그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대대로 내려오던 그들의 법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리에 반대하는 말을 한다는 그것만으로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는 크나큰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곧 진리며 옳은 말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이 누군가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칭찬을 한다면 일단 자신들의 법도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서 진리를 가지고 칭찬을 듣고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모르는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 무엇에도 자신을 위한 행동은 없었습니다. 결례를 행한 것도 오해를 풀고 유대인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복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을 피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자신에 대한 오해로서 붙잡히는 대도 불구하고 일언반구 변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그 무슨 말을 해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자의 싸움은 자기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승리는 세상처럼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지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다는 것은 굴욕이며 수치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수치를 받고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붙잡으면 붙잡히고 때리면 맞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지지 않으려고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해서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시험입니다. 자신을 증명하는 싸움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참된 모습은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과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자는 자기 이름을 위해 싸우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내 이름은 포기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기독교기에 기독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사단의 시험입니다. 창조과학회가 과학적으로 창조를 증명하려는 것도 진화론자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학문으로 진화론이라는 학문을 이기고 싶은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한다면 진화론자들이 뭐라 하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고 그것을 말하면 살아갈 것입니다.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믿음으로만 믿어집니다. 그것을 과학이란 학문으로 증명해서 지식으로 굴복시키고 믿게 하겠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싸움일 뿐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서 제 말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누르고 이기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글을 쓴 적도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나의 옳음을 밝히기 위해서 나의 성경 지식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붙잡으면 붙들리는 길을 갑니다. 자신을 세우기 위한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우는 길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고난이고 붙들림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