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1-36 하나님의 일

<본문>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사도행전 21:31-36)

<설교>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라는 문제까지 들어가게 되면 사실 많은 혼란과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게 됨을 알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고와 사건들을 놓고 생각할 때 ‘이런 일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혼란에 접하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결과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생각하는 바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스스로를 기독교라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독교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도와주려면 기독교인을 도와줘야 하고, 잘되게 하려면 기독교인을 잘되게 해야 하고, 어려운 일은 몽땅 불교인들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어도 예수 믿는 사람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생각이나 뜻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믿는 자만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를 알기가 매우 쉽다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지키셨다’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독교인이 죽고 불교인이 살았다면 과연 그런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실제 우리 주변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기도원을 다녀오던 교회 승합차가 사고가 나서 신자 모두가 죽습니다. 여행을 떠난 교회 버스가 전복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일순간 신자로서 매우 곤란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러한 일들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해를 해 보기 위해 사고를 당한 자나 교회를 죄로 몰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숨긴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알에 불의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라고 여겨버립니다. 결국 자기 상식에 맞는 답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과 불신자는 그 어떤 관계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이것이야 말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일은 신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아는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불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러한 생각이 옳은가를 성경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붙들리고 난 뒤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30절에 보면 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붙들어 성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군사와 백부장을 거느리고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군중들은 그들을 보고 바울을 치는 것을 그치게 됩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라 명하고 바울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는가 묻지만 여기저기서 바울에 대해 외치며 소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유대인에게 붙들렸던 바울이 이제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린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까? 사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손에 붙들린 것이 안전합니까? 아니면 로마 군인의 손에 있는 것이 안전합니까? 답은 후자입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아니었으면 성문 밖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소동을 천부장이 들음으로 인해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구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에 의해서 바울이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천부장이 바울을 살려주기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소동의 연유를 알아보기 위해 바울을 붙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바울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우연히 천부장이 소동을 듣게 되었고, 우연히 소동의 현장에 나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이방인인 천부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에서도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만에 의해서 유대인이 몰살당할 위기에 있을 때 에스더를 사랑한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 유대인이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일에서도 아하수에로라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은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이방인이 잘되고 잘사는 것을 볼 때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쓸모없기 때문에 버려져야 하고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 스스로 ‘나는 신자고 저 사람들은 불신자다. 그러니 하나님은 신자인 나는 도와줘야 하고 불신자인 저들은 돕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있고 교회를 다닌다는 명분 때문에 불신자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자체가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우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불신자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우리의 힘이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이 있기 전에는 이방인이었고 사망에 처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은혜로 인해서 생명으로 옮긴바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사망의 자리에 있는 불신자를 바라보면서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이지 ‘나는 이제 신자되었으니까 불신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신자 답지 못한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불신자 역시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살리기 위해 불신자를 바울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부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일을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의식하지도 않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신자 역시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4:28절에 보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고레스는 바사 왕인데 하나님은 그를 ‘나의 목자’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고레스로 인해서 포로에서 해방이 되고 예루살렘을 중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레스가 하나님을 믿은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입니까?

고레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일 뿐입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레스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쓰이는 당사자들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이방인의 속성까지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불신자들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신자가 잘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불신자를 잘되게 하셔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생각할 때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풍랑도 가뭄도 홍수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로 있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가?'라고 묻지 마십시오. 일초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무지한 우리가 어떻게 영원을 내다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린 다만 되어지는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무엇이 신앙인가를 묻고 나아갈 뿐입니다. 불신자를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속해있는 나의 삶의 주인 역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사용하시던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종으로 부르셨으면 종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 불신자까지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까지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내 주인이라면 불안해하고 염려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