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7-22:1 부형들아

<본문>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사도행전 21:37-22:1)

<설교>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주어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즉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속에 간직한 자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나에게서 무엇이 보여지는가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믿음이 있는 나에게는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분명 천국과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사는 사람과는 차별된 모습이 있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연 그것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세상 사람과의 차별의 표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종교적인 행위를 배제했을 경우 세상 사람과의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종교적인 행위를 배제한다면 과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여러분과 세상의 차이는 뭡니까? 오늘은 바로 이점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죽을 뻔한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 의해서 구출되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천부장은 바울을 구하려는 의도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바울의 목숨을 구한 것을 통해서 이방인까지 하나님 일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잘살고 성공하는 것으로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방인이 잘 살다면 그것은 이방인을 하나님이 사랑해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을 잘살게 하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잘사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잘사는 것보다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잘사는 것이 진정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고, 필요에 의해 이방인을 잘살게 해서 우리 앞에 세우기도 하시고 또는 우리를 핍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천부장에게 잡혀서 끌려가는 바울이 천부장에게 자기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줄 것을 부탁 합니다. 이것을 천부장은 허락을 하고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백성들에게 외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단순히 바울이 자기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기준으로 해서 바울을 생각하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를 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보통인데 바울에게서는 그러한 반응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22:1절을 보면 바울은 변명을 시작하면서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형들아’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반말로 들려질 수 있지만 사실은 ‘부모 형제 여러분’이라는 아주 정중한 표현의 호칭입니다. 이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자신을 반대하고 죽이기 위해 쳤던 자들을 향해 ‘부모 형제 여러분’이라는 정중한 표현의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개인적으로 친한 자와 친하지 않은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친분도의 여부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나 말에서 당장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자신을 반대하고 공격하며,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기까지 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공경어린 호칭을 사용하며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자신을 반대했던 것에 대해 잊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정중하고 친밀한 호칭을 사용하며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미움을 속에 감추고 이러한 호칭을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움직였던 바울이 속에 미움을 감춰두고 정중한 호칭을 사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자신을 공격하고 해치려는 사람에 대해 반감이나 미움을 갖지 않고 정중한 말을 하는 바울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런 마음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의 인격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종교는 이러한 모습을 추구하며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갖추기 위해 인격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나 그를 미움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높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을 강조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바울과 같은 모습은 우리가 인격을 수양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을 수양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감추고 억누르는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해치려는 자에 대한 미움과 반감이 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면서 얼굴이 인자함과 미소를 띄울 수 있는 것을 고매한 인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내라는 것으로 이뤄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과연 바울이 이런 수준일까요?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다른 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열매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척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를 세상 종교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종교가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씨가 우리 속에 있음으로서 자연히 맺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를 보면 스스로 열매를 맺기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를 닦으면서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 가는 일방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바울뿐만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었던 스데반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두고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고, 미워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복수와 심판을 요구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스데반의 마음이 과연 인격수양으로 맺어진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미움을 억누르고 자비를 보이는 가식이라 할 수 있습니까? 스데반의 모습은 다만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증거가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선행을 하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신의 덕을 쌓는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하며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냥 믿고 섬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기 그 다스림에 복종하자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욕심도 목표도 몽땅 하나님께 복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쓸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라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가 악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바울을 돌로 치는 유대인들도 바울도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인간대 인간으로 만난다면 분명 유대인은 나쁜 사람이고 바울은 좋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욕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바울을 치는 유대인도 애매하게 맞는 바울도 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바울도 유대인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살아남을 사람인 것입니다. ‘저 사람이 악하면 너도 악하고 저 사람이 못났으면 너도 못났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에서는 비록 자신을 해치는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이 보일 뿐입니다. 악한 나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듯 악한 너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달하고 가르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인격 수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을 다스리는 신앙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서 바울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읽되 말씀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되 복종할 분으로 믿지를 않습니다. 삶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기 보다는 본래의 내 성품과 욕망을 따라 움직이기에 바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를 신자라 이름 하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못난 자이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필요함을 믿는다면 신자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 사람의 행동과 성품을 기준으로 해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선하고 양심 바르게 산다고 해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는 어디에서든 이러한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살아가면서 ‘너는 어차피 지옥갈 사람이니까 상대안하겠다’는 시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옥갈 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해치는 유대인을 향해 ‘부형들아’라는 정중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이 가지지 못한 뭔가 큰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은 붙들려 있고, 당하는 입장에 있지만 바울은 자신은 붙들린 것도 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붙들린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을 부형들아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부요함과 자유함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신앙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증거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