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7-23 유대인의 분노

<본문>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사도행전 22:17-23)

<설교>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에 유대인들에게 한 자기 변명의 말은 다만 자기 인생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간섭을 얘기한 것뿐이었습니다. 결코 스스로는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자신임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람이 된 것은 부활하시고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능의 결과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의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과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력과 불가능을 말하면서 예수의 간섭과 권능을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믿을 것은 오직 예수님의 간섭과 권능이지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관에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와는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 교회가 기독교를 종교화함으로써 세상의 종교에 기독교가 혼합되어 버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게 되고 기독교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신자로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 그 본질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섬겨야 할 대상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신이 세상 만물을 다스림을 믿는다면 그것은 나의 인생은 신으로부터 간섭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고집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공과 자기 발전, 자기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할 뿐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종교는 불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가 부처를 신으로 섬긴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불교의 원리는 도를 깨우친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에 있습니다. 부처가 깨우친 도를 나도 깨달음으로써 나 역시 부처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을 득도라고 말합니다. 결국 불교는 모두가 부처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지 누구에게 굴복하고 섬기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일뿐이며 내가 어떤 나로써 완성되는가가 그들의 숙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가 한국에서 크게 변질됨으로써 부처를 신으로 섬기며 부처를 섬김으로써 복을 받는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의 복에만 관심을 두고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역시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며 그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오히려 나의 고집과 욕망에 대해 하나님이 굴복해주기를 바라는 식의 거짓 신앙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을 말하는 것은, 지금껏 자신이 한 일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으로 되어진 일이었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뿐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22-23절에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을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세상에 살려둬서는 안될 자로 여긴 것입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은 무슨 이유로 바울에 대해 이토록 분노하는 것입니까?

이 말 하는 것까지 듣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의 말을 그런대로 들어주다가 그들을 분노하게 한 대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21절의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기름에 불을 댕긴 것처럼 유대인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왜 그토록 분노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을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천하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오직 유대인 자신들이며 자신들만을 구원하신 분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혹 구원을 얻고자 하고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유대인이 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유대인이라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누구든 그러한 사상을 전파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참람케 하는 자이며 당연히 죽여야 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다는 말씀을 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껏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바울의 이 말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리는 싸움입니다. 나의 자존심 우월감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며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며 철저히 낮아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분노가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도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우월감과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분노한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있는 우월감과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여러 가지 잘못된 병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우월감과 기득권을 가지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경험을 내세워서 그러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종교 행위를 가지고 행세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월감을 무너뜨리는 말을 할 때 필히 반발심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기도 한 사람이 자신이 행한 40일 금식기도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40일 금식기도가 구원의 증거물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면 분명 그 말에 대해 반발을 할 것입니다. 40일 금식기도라는 대단한 행위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신앙에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제일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높이고 찬양할 뿐 나는 무슨 일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 앞에서는 결코 내세울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내세울 가치도 없는 것임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교단도 교회도 나의 행위도 무가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단이 아무리 정통이 있고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보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것 앞에서 우리는 그 무엇도 내세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높일 것은 그리스도일 뿐이지 교단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며 내 행위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 우리의 신앙은 오히려 예수님을 훼방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는 교회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안믿는 불신자가 아니라 믿음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분노는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권자로 확고히 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가치한 존재임을 늘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우리 안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것이 기득권이 되기도 하고 열심히 행동하는 것이 우월감이 되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위치에 나를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5년 다닌 사람이 있고 3년 다닌 사람이 있다고 할 때, 5년 다닌 사람보다 3년 다닌 사람이 먼저 집사가 되면 분명 분노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늦게 교회에 출석했는데 왜 먼저 집사가 되는가?’라는 분노와 섭섭함이 일어나고 심하면 교회를 떠나버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무가치함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5년 다니고 10년을 다녔으면 뭐합니까? 그 기간 동안에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산 날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본다면 오히려 남보다 먼저 교회를 나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며 이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하나님께 철저히 굴복한 신자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먼저 나온 사람 나중에 나온 사람의 서열이 정해지고 그 서열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서열이 무너지는 것이 질서입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중이 먼저라는 새로운 서열을 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먼저 되기 위해서는 나중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질서와 서열이 제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와 나중의 개념을 버릴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먼저와 나중은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먼저 된 자가 먼저이지만, 그러한 상식까지 깨뜨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남이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며 심사가 뒤틀립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보다 이웃 교회가 더 낫고 사랑이 많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내 안에 무너지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고 경쟁하고 내가 더 우위를 차지하려는 못된 심성이 자리하기 때문에 내가 낮아지는 말에 대해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분노가 존재하고 있음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신앙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께 굴복한 자로서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무너져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무너질 때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로 되고 굳게 세워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