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2:22-36 베드로의 설교

본문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삼천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한번 베드로의 설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마음에 찔림이 있고 '어찌할꼬'하는 심정으로 회개하게 되어집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고, 하나님이 다시 예수님을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중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서 삼천이나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는데도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입니까? 그저 성경책의 한 부분을 대하고 있는 것일 뿐, 마음에 찔림도 없고 회개도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베드로가 23절에서 말하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는 내용을 자신들이 행한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을 자신들이 스스로 행한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있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당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곧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세우신 분을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들이 죽였음을 생각할 때,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들의 허물이며 무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없을 수가 없고 회개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한 설교를 목사들이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내용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대로 했을 때 과연 베드로의 경우처럼 삼천 명이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숫자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에 단 한 명이 회개를 했다면 아마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이라는 많은 수가 회개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이든 한 명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 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듭니까? 보나마나 한 명보다는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이 힘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죽은 사람 한 명을 살리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 삼천 명을 살리는 것이 힘듭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한 명이든 삼천 명이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 한 명을 살리든 삼천 명을 살리든 모두가 큰 능력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마음도 감각도 죽은 자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회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 역시 자신의 허물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능력은 회개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가 된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삼천이라는 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한 명은 회개시킬 수가 있는데 삼천 명은 안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수의 회개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일 뿐, 회개가 죽은 자가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결과라는 것은 도외시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단 한 명의 회개라 할지라도 인간의 논리나 설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회개할 수 있다면 그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바로 자신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한 사람들처럼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질 때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람의 마음에 찔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대하면서 마음에 찔림이 없고 회개함 역시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목사가 그대로 설교한다 할지라도 자신과 상관이 없는 얘기로 듣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단지 설교일 뿐, 그의 마음을 찌르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설사 불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지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3:11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5:7절의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는 말을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으되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보든 설교를 듣든 중요한 것은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이며 나와 상관이 있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경도 설교도 결국 여러분의 마음에 남지 못하고 듣고 본 것으로 끝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들을 주로 합니까? 혹시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대개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자의 자리에 자신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죽인 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조차도 아직 오시지 않은 주를 뵈웠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다윗의 우편에서 다윗이 요동치 아니하도록 붙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다윗도 예수님과의 관계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과의 관계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의 사건이 우리의 마음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우리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는 그저 다 아는 이야기로 들려질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은 귀찮은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역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저 교회 다닌다는 것으로 신자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배드리고, 간혹 좋은 일에 헌금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자신을 신자로 여기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은 돈 없으면 못살지만 신자는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으면 못산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에 대해서도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뭔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으며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근거도 이유도 없이 교회를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무턱대고 아무 생각없이 주일이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말고 교회로 모여야 할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사신 길을 따라가야 할 근거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직장 생활을 힘들어 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싫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힘들고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것은,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현실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한대로 행동합니다. 교회 역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로 모여야 할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고,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다는 것을 통해서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삶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