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4-29 신앙의 애매함

<본문>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 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사도행전 22:24-29)

<설교>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놈을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크게 분노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바울을 천부장이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여 바울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이것은 바울을 구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로 바울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가죽 줄로 바울을 매었을 때 바울이 곁에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25절)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전하자 천부장이 바울에게 와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음을 확인하자 바울을 결박한 것으로 인해 두려워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결국 바울은 채찍질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는 위기를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서 또 다시 면하게 된 것입니다.

16장을 보면 바울이 옥에 갇혔다가 나갈 때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밝혀서 옥의 상관들을 두려워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경우는 옥에서 풀려 날 때 로마 사람인 것을 밝혔기에 시민권을 이용해서 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로마사람인 것을 말함으로써 아예 채찍질 자체를 면한 것입니다. 16장에서처럼 한다면 채찍질을 당한 뒤에 로마 사람인 것을 밝혀서 때린 자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시민권을 이용해서 아예 매를 피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생각하기에 따라 의구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바울다운 행동이라면 죽든 살든 채찍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채찍질을 당하다 ‘예수 그리스도 만세’를 외치고 죽어가는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멋있는 믿음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시민권을 이용해서 매 맞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매 맞는 것이 무서워서도 아닐 것인데 과연 바울은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이런 일을 실제 우리의 삶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고 저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많이 부딪히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에서 신앙이란 무엇이며 신앙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매를 맞아 죽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시민권을 이용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신앙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바울의 행동을 본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바울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바울다운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로마사람인 것을 말하지 않고 채찍질을 당하다 죽는 것이 바울다운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게 바울다운 멋있는 신앙이겠지만, 바울의 생각은 달랐던 것입니다.

바울서신에서 보여지는 바울다운 것은 무턱대고 매맞아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바울다운 것은 그의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관심의 모든 것이고, 사나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 바울다운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로마사란인 것을 밝힌 것 역시 자기 한 목숨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명분을 지키려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보다는 자신의 명분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의 기도는 그들의 명분을 위한 것이었을 뿐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단지 기도를 많이 한다는 인정만 받으면 되었던 것이지, 내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든 말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어떻게 보시든 그런 것에는 두지 관심을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1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자기 이름과 명분을 위해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아버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바울다운 것은 죽는 것도 아니고 매맞는 것도 아니라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주님을 중심으로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다운 것도 기도나 금식 헌금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이름과 명분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처럼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는 것도 자기 명분을 위한 금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슬픈 기색을 낸다는 것은, 금식을 이용해서 자신의 신앙인다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 자기 명분을 위한 금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하고 매 맞아야 신앙이고 바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신이 사는 길로 나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위기의 경우에 로마사람인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 사실을 감추고 매를 맞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난해한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은 분명 살기 위해서 시민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계속하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점에서 죽어서는 안됨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내가 죽기 싫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살 수 있는 상황에서 고의로 죽음을 자초한다는 것은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살기 위해 힘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애매한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고자 한다면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느냐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요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경우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신앙적인 면에서 옳은 것입니까 틀린 것입니까?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것이 신앙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건강을 지키고 오래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이 뭔가 신앙과 맞지 않게 보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몸이니까 잘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소유의 몸으로 여기고 관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결국 운동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로 그쳐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도 요즘 운동을 하고 있지만, 저는 운동을 하면서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를 가금 생각하곤 합니다. 런닝머신위에서 제자리를 열심히 뛰면서 ‘내가 왜 이렇게 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을 위해서라는 생각도 들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들지만 바울이 로마사람인 것을 이용해서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보면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가지 생각할 것은, 비록 바울이 로마사람인 것을 이용하고 위기를 벗어나기는 하지만 이후로 계속 편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고 바울은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바울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로마사람인 것을 밝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한다고 해서 고난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운동을 하고 건강을 지키면서도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내 인생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바울은 시민권을 이용해서 위기를 면했지만, 그는 그것으로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운동을 하여 건강을 지키고 있다면 건강한 삶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내 몸은 하나님이 책임진다고 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세워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