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 담대하라

<본문>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23:11)

<설교>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기를 소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토록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봤다는 것 자체를 좋은 징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돼지꿈을 꾸면 좋은 일이 있다는 암시인 것으로 여기고 복권을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봤으니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하는 것입니다. 뭔가 예수님이 내편이라는 확실한 증거물을 받은 것 같아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무조건 좋은 일과 연관시켜 받아들이지만 사실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그러한 처지의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면, 옥문을 열어주고 탈출 시킨다거나 아니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위로의 말을 해주시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일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에 대해 이러한 생각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옥에 갇힌 바울에게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당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당할 것이니까 담대하라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장차 있을 환난에서 바울을 건져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환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환난으로 밀어 넣고 있는 말씀임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날 위한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위해 신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것도 고상하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일에 열심이고 기도를 부지런히 하는 차원의 것으로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착한 일 조금 하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환난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에 환난이라는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나에게 불리하고 손해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의 길이라면 가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편함을 위해 이 길을 없애거나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은 지금도 우리에게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바울에게 존재했던 그 길이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고, 사도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음 걸어가시면서 보이신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반대와 핍박과 멸시가 날아드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사도가 갔고 이제 우리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담대하라는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길이기에 담대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행 14:22절에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대로 풀이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환난은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환난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 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당연한 과정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환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면 이건 분명 모순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옳고 그름은 이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환난을 당연한 것으로 선포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환난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오고 복을 받는다는 식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복지를 중심으로 한 종교로 전락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복지를 포기하지를 못합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에게서 복이 되는 것을 받아 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본문에서 말하는 ‘담대하라’는 말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담대하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일 때문에 기죽지 말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스리시니 담대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신자가 현실에서 담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을 전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의 곁에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담대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환난을 당할 때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일까요? 모든 환난을 고스란히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은 분명 그럴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것입니다. 잘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잘못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곁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바울이 편한 길로 가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의 길을 가게 될 것임을 확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돕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를 돕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환난이 편하여 편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환난은 신자인 나에게 당연한 것임을 확인하고 그 길을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신자에게 환난은 단순한 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고의적으로 고생시키기 위해 환난을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을 해봐야 믿음이 자라기 때문도 아닙니다. 환난에는 주님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즉 우리를 세워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환난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환난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믿음에 거할 때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확고히 할 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에서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생을 참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어려움에서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나의 본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담대함은 인간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도 아니고 성품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일을 위해 내가 살고 있음을 아는 믿음에서 담대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도 주님을 증거하고 보여야 할 일로서 나에게 주어진 것임을 생각할 때 신자는 언제든 어떤 일에서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일에서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라는 말입니다. 환난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내가 편해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일을 위해 주어진 환난임을 생각하며 믿음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이 담대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이미 주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굳이 환난이 필요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환난이 없이 그냥 편안한 가운데서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과 세상의 관계를 무시한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에게 축척된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고, 유대인식으로 하면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복음의 관계는 필히 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필연적 과정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환난에서 주님을 더욱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환난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두도록 하는 것입니다. 환난에서 자연히 주님의 도우심을 원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도우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신자의 마음을 주님께 붙들어 놓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신자의 마음을 깨우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는 어떤 환난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 주가 나를 떠난 증표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증표임을 알므로 인해서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바울의 인생에 편한 길을 준비하지 않으셨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즉 주님을 위해 사니까 복을 주셔서 좀 더 편한 길로 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환난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환난에서도 담대할 것은 세상이 신자를 건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이 신자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은 신자를 세워서 할 일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신자는 세상이 건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담대함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에서든 담대하십시오. 어떤 최악의 상황이 여러분 앞에 벌어진다고 해도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일에서도 주님이 여러분을 떠나 계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항상 여러분 곁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보이는 것에 집착한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모든 일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일을 담아서 여러분 앞에 펼쳐 놓으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일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로 세워졌음을 알고 모든 일에서 주님만을 원하고, 주님만을 필요로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세상은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담대함입니다. 부디 어떤 일에서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