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3-22 진짜 중요한 문제는

<본문>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사도행전 25:13-22)

<설교>

여러분은 세상을 바라볼 때 누가 불쌍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사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지옥 가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과연 몇 억씩 하는 아파트에서 외제차 굴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불쌍하게 보이던가요? 아니면 그들에 비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초라하게 살아가는 내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던가요?

우리는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시각은 다른 쪽으로 돌려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부러움과 불쌍함으로 나눠지는 시각 말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건강한 사람보다 깊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불쌍하게만 보여 집니다. 찢어질 듯 가난해서 하루 먹고 사는 것도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여 집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생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참된 불쌍함의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고전 15:19절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섬김과 희생을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부활이라는 든든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세상 것이 없다 해도 참으면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라면 우리가 신자의 길을 가는 것은 결국 헛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더욱 불쌍한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부활이라는 든든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 소망을 헛되이 하며 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더욱 불쌍한 사람의 자리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심을 말하고 신자의 부활을 말하면서도 부활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일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다고 되어있는데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면 ‘어떻게 왕이 총독에게 문안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아그립바 왕은 로마 황제에 의해서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세워진 사람이었고 베스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에게 잘보여야 하는 아그립바 왕으로서는 로마의 총독이 부임하면 먼저 찾아가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18,19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스도는 처음에는 바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워낙 강경하였고 죽어야 한다는 의견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엄청난 악행을 범한 죄수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재판 자리에 데려왔을 때 정작 유대인들은 베스도가 생각했던 악행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말했던 것은 단지 자기들의 종교 얘기였고, 바울이 죽은 예수를 살았다고 주장한다는 것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스도는 바울의 일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대수롭지 않는 종교 싸움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교리적인 문제를 두고 서로 다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하고, 예수님 때문에 어떤 싸움을 하든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했든 승천을 했든, 언제 재림을 하든 철저히 관심 밖의 얘기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이단이든 이단이 아니든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지만 세상은 철저하게 무관심합니다. 세상의 관심거리는 오직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에 대한 베스도의 생각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말하는 우리 자신들이 베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는 그리스도이시고, 죽으심과 부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민감한 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린 그야말로 더욱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돈 없는 인생에 비해서 예수 없는 인생이 더욱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리고 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 없는 인생이란 내일이 없는 인생과 같은 것입니다. 이생이 전부이고 때문에 죽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죽음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있는 인생은 내일이 있습니다.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예수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러한 복된 인생에서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인 우리가 가는 길이 아니며, 길이 되어서도 안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까? 예수 있는 인생을 위해 힘쓰고 계십니까?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배우기를 힘쓰고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힘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살기를 힘씁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좋아 보이고 복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죽음의 자리에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되고 복이 되던 것들이 죽음의 자리에서는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습게 여겨지십니까? 여전히 별 것 아닌 문제입니까?

현대 교회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 분위기가 어떤가에 의해 교회의 부흥 여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원하는 분위기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그런 분위기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활력이 있는 분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는 그런 면에서는 낙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로 저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교회 분위기는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껏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부활한다는 소망으로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 속 깊이 인식하고 오로지 주님을 노래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생뿐이면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과연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여 세상 것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코 말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이 예수님께 좋은 것이겠습니까? 세상 것이 좋은 것이라면 처음부터 우리에게 세상의 것을 위해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깎고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싫고 힘들다고 도망치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두 손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은혜며 사랑입니다. 이것을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잊지 마시고, 무엇으로 누구 때문에 가게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보배가 되시는 그분만으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 소원이 여러분에게 놀라운 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