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8 살아계신 예수님

<본문>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18)

<설교>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하는 말을 볼 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붙잡힌 처지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바울은 담대하게 사도로서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한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 너 자신을 위해 할말이 있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변명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일이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 예수님의 부화하심을 전했기 때문임을 잘압니다. 그리고 아그립바도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그립바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한다면 바울에게도 더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변함없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그립바에게 부활의 소망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고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과 사도가 세상을 사는 것이 달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중심에는 내 자신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기준을 항상 나 자신에게 두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행동하고 손해가 되면 물러서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들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내게 어떤 불이익이 닥치고 손해가 있게 될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회를 틈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에게는 양보와 타협이 없습니다. 적당히 절충하면서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은 감추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사도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사도를 담대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일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기 경험을 드러내는 차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만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9-12절에 보면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행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고 대제사장에게 권세를 얻어서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외국 성까지 쫓아가서 성도들을 핍박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원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을 자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자가 믿은 것이 아니라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을 통해서 믿음의 신비함을 증거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증거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오신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예수님이 찾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해 버려도 마땅한 그런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찾아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해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이 바울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찾아오심으로서 만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찾아가고 싶어도 못찾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찾고자 할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자신의 뜻과 힘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개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난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바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사환과 증인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예수를 만난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을 내세워 자기 신앙을 높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것은 나같은 자를 찾아오시고 만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은혜와 긍휼하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뭔가 하겠다고 나선다면 자신을 높이는 결과가 되어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죽이고 핍박하러 다닐 때에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부지런함과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신앙인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나 같은 자에게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자신을 세워 일하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중점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할 일을 일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보내어 예수님이 하실 일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바울을 보내신다는 것이고, 눈을 뜨게 하신다는 것이고, 예수를 믿게 하여 기업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눈을 뜨게 하라, 믿게 하라, 기업을 얻게 하라가 아니라 ‘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일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셨기에 계속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믿되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일하심을 믿었기에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바울은 신앙은 자기 열심으로 뭔가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범사에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열심을 내서 행하는 것이 신앙인줄 알았기 때문에 자기 열심 으로 성도들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런 성품 그대로 예수를 믿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요? 자기 열심으로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 설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단이라고 소리치며 그들을 정죄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성격이 변화되었다기 보다는 부활하신 주님이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심판자가 아니라 사환으로 증인으로 세움받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린 다같이 심판자가 아니라 다만 사환이며 증인일 뿐입니다. 나에게 찾아오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과 열심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으로 맺어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신자라면 이러한 변화는 분명히 있습니다. 나같은 자도 구원하신 은혜와 자비하심을 깨달은 성도라면 자신은 별 볼일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증거할 것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우리의 머리에만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으로만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살아 계셔서 그분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