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4-29 바울이 원하는 것

<본문>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사도행전 26:24-29)

<설교>

사람에게는 저마다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볼 때 평소 자신이 원하고 꿈꿨던 조건과 환경과 모습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를 부러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좋은 환경과 조건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 처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이 현재 자신의 조건과 모습에 만족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개인적인 소망과 포부로 살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소망과 포부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고 크신 분의 소망과 포부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소망을 따라 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현재의 모습과 조건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붙들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감히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현재의 여러분 자신의 조건과 처지와 모습에 대해 만족함이 있고 감사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만족치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 남들보다 돈이 없는 것으로 불만족하십니까? 아니면 큰 집에서 살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워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불만족과 부끄러움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한가지 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당당함과 담대함, 그리고 떳떳함입니다.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것으로 인한 당당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영생은 세상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돈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고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느낀다면 과연 그가 소유했다고 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신자는 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부자이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친구를 만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쩔쩔맵니다. 아부를 하면서 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돈 있는 자는 돈의 힘을 체험하게 되고 역시 돈이 최고라는 것을 더욱 굳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그러한 착각에 신자까지 나서서 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라고 하면서도 돈 있는 친구 앞에 굽실거림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돈이 제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세상의 착각을 돕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세상의 조건에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돈 앞에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로서의 이런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세상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아주 초라하고 좋지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같은 동족에게 쫓겨 다니고 그들의 고소를 받고 죽이라는 성토를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러한 처지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에 대해 변호하면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29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결박당한 자신의 처지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기에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물론 바울은 결박당한 자신의 처지를 대단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볼 때 무슨 정의로운 일을 위해 투쟁하다가 붙들려 갇힌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적으로 여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 때문에 붙들린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결박당한 것 자체를 위대하게 보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는 무엇이 있었고 무엇을 위대하게 보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24절에 보면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베스도가 볼 때 바울은 미친 자였습니다.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베스도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어두움 안에 있는 불쌍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권력이 있고 부가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부러움을 살만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베스도가 바울이나 아니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닙니까?

세상에서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고난과 역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할지라도 실패한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향해서, 그리고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왕이고 총독이고 하는 지위나 권력, 그리고 부라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곧 참된 행복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기에 나와 되라는 말이 당당하게 나와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예수를 알고 같은 믿음으로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막연한 소망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 자신에게부터 소망이 힘으로 자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국을 소망한다 하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나보다 많은 것, 좋은 것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가장 먼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었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 왜 내 인생에 빛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은 잠시 후면 지나갈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참되고 영원한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린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면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 앞에서든 할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모른 자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