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풍요속의 죄



<본문>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 1:1-2 개정)


 



<설교>


아모스서는 구약에서 소선지서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소선지서라는 것은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활동 기간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활동기간이 적기 때문에 기록된 양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대선지서)에 비하면 작습니다.


 

선지서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선지자의 등장 의미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등장을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아주 엉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이 엉망일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에게 경고를 하시고 징계를 행하기도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방 나라는 어떻게 살든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시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내어버려두심’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 멋대로 살다가 지옥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멋대로 살도록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선지자의 등장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등장하여 백성들에게 돌을 맞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엉망일 때 선지자가 등장을 한다면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지서를 읽을 때도 ‘신앙이 엉망인 나에게 선지자를 세워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둔 신자로 산다면 말씀은 기쁨이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마음을 둔 채 말씀을 대한다면 그 어떤 말씀도 기쁨이 되거나 힘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엉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게으른 것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엉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에도 둔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각할 때는 죄라고 생각되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을 때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빠지고 여행을 갔다든지, 십일조를 안한다든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죄를 자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말은 신앙행위가 있고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죄를 자각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1절을 보면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간략하게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소개하며 시작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유다와 이스라엘의 어느 왕 때 아모스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조금은 번거롭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느 왕 때 아모스가 보냄을 받았는지 자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아모스가 보냄 받을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가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로 가장 부강했을 때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땅은 하맛과 다메섹이란 왕국이 거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전쟁을 하는 틈을 타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잃었던 땅을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부강함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아모스가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처럼 부강함과 풍요를 누렸을 때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거나 신앙이 엉망이 될 때, 그 이유를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즉 힘들고 어려우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풍요롭게 잘살게만 해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바르게 잘 할 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풍요와 부강함을 누리도록 하셨지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등장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환경과 형편이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형편이 좋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원망과 불평 그 자체를 죄로 보기 전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죄의 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강하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가 등장하고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부르짖는 소리에 의해서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이 마른다는 것은 가뭄으로 인해서 푸른 초장이 마를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의 진노가 과연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이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시온이나 예루살렘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곳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거룩한 제물의 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입니다. 그런 시온에서부터 하나님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에 대한 문제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했을 때 발생하는 악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부강했다고는 하나 그 안에 약자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이 부강했다고 해서 모든 백성이 다 부강하게 잘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모든 나라가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골고루 잘사는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발생하는 것은 잘사는 사람은 믿음이 좋아서 복 받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가난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삶의 형편에 대한 이런 시각은 지금의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암암리에 잘사는 것과 못사는 것이 신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부요한 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8:11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합니다. 푸른 초장을 마르는 기근을 주신 것이 단지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것이 진짜 기갈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부강함으로 인해서 신자에게 참된 기갈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예 자신이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상태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생활은 많은 것을 행하는 풍성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부요를 원하고 부요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것은 그 안에 말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없는 참된 기갈을 느끼지 못합니다. 현실의 풍성함 때문에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풍요 속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세상 것으로 풍성해도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기갈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