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5  이방 나라의 죄



<본문>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 1:3-15 개정)


 


 


<설교>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인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외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정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로 가장 부강해진 상태였고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이 보였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하나님을 잘 섬기니까 복을 주셔서 이렇게 잘살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모스를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방인의 죄를 먼저 책망을 하시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말씀을 합니다.


 

이방인의 죄를 책망하시려면 해당되는 나라에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을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즉 일본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시려면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옳은데, 한국에 사람을 보내서 일본의 죄를 책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면 되는 것인데 왜 굳이 이스라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인의 죄를 먼저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메섹과 가사, 두로, 암몬, 에돔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서너 가지 죄에 대해 책망을 합니다. 모든 나라가 동일하게 서너 가지 죄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모든 죄가 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는 그 행동의 여부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죄는 행동을 가지고 죄의 경중을 따집니다. 가령 도둑질과 살인이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할 죄이기는 하지만 죄의 경중은 같지 않습니다. 도둑질 보다는 살인을 더 무거운 죄로 여기고, 살인한 자에게 더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이 죄에 대한 세상의 상식이고 질서고 원칙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의 죄를 보면, 죄의 행위들이 모두 악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다메섹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3절)고 말하지만, 가사는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6절)고 말합니다. 두로 역시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9절)고 그 죄를 말하고, 에돔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11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암몬의 죄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13절)고 말합니다.


 

이들이 행한 악행 가운데서 가장 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른 행위입니다. 또한 단지 길르앗을 압박한 것보다는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팔아넘긴 행위가 더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세상의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각기 다른 심판이 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모든 죄를 행한 이방 나라들에 동일하게 불을 내려서 그 궁궐들을 사른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심판은 그들의 악함이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나라의 악행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그들의 죄는 동일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 나라의 죄를 말씀하시고 2장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말씀하시는 것도,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가 이방인과 동일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방 나라의 죄를 선포할 때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 나라와 유다와 이스라엘이 동일한 악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이방인과 예수를 믿는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있지만, 신자인 자신은 죄를 범해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모두가 용서받을 자는 아닙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으로 산다면, 교회를 나오든 나오지 않던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시 이스라엘은 외형적으로는 신앙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면, 신앙이나 죄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의 죄에서 동일한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횡포입니다. 그 행동은 비록 다르지만 강자로써 약자를 억압하고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악함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본질을 보시는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승리한 나라는 패배한 나라의 백성을 포로로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포로를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아서 재산을 축적합니다. 이것을 승리한 강자가 마땅히 누리는 결과물로 여깁니다. 즉 이방 나라는 승리의 배경에 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강함과 힘으로 얻은 승리이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약자는 강자에 의해 고통을 받고 억압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서너 가지의 죄로 표현을 하시면서 불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악으로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 이방인과 같은 사고로 산다면 이방인과 똑같이 대우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는 죄에 대한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방 나라를 향한 책망을 보면 우리는 이방 나라와 같지 않고 따라서 죄와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도 동일한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렇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비하면 참으로 믿음이 있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뉴스에 나오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에 비해 나는 더 낫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과 비교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안 한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낫고, 한 시간 하는 사람보다 두 시간 하는 사람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는 것은,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면서 그 힘의 여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다르게 대하는 습성입니다. 이러한 습성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관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약자를 억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약자를 억압하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은 결국 도덕군자가 되십니다. 약자를 억압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도덕과 동일한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위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안다면 스스로를 강자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하기 있기에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세상의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강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도 은혜의 것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의 삶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만한 행동이 나온다면 그 역시 은혜일뿐입니다. 때문에 어떤 행동으로도 자신을 과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