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



<본문>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암 2:1-8 개정)


 


 


<설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땅에서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도덕과 종교적인 것들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선한 것이 되지 못하고 길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십자가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세상이 온통 살인과 도둑질이 판치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중심이 되어서 나름대로 삶의 질서가 구축되어 있었고, 그 질서에서 어긋나면 징계를 하면서 세상을 바로잡고 선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힘을 썼기 때문에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만 했습니다.



이처럼 나름대로 선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세상에 예수님은 왜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종교 생활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 까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세상의 악에 의해 희생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죄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하셔서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드러난 죄는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간주하면서 자신이야 말로 선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풍요로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자부할만했고, 그래서 풍요로움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이 이처럼 복을 누리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모스를 등장시켜서 먼저 이방인인의 죄와 심판에 대해 선포하게 하시고, 이어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 대해 선포하게 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의 죄를 먼저 선포한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의 자식으로 여기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나 이스라엘의 죄를 보면 이방인의 악행에 비해 가볍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4절에 유다의 죄를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4-6절)는 말처럼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는 앞에서 언급된 이방인들의 죄에 비하면 가볍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몬은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악했고, 1절의 모압의 죄 역시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 정도로 악했습니다. 즉 에돔을 정복하고 사로잡은 왕을 죽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시체를 불살라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악행에 비하면 유다나 이스라엘의 행위는 가볍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죄를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이방인과 다르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방인과 동일하게 죄와 심판에 대한 말이 선포된다는 것은 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말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유다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과 동일하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나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선포를 대하면서 예배를 잘 드리고 헌금을 잘하는 등의 신앙생활이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고 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죄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짓 것에 미혹된 것으로 말합니다. 즉 유대는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거짓 신을 쫓았을 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죄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가 언급되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죄가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22:37-4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비춰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서 벗어나 있을 때 그 악함은, 자신의 유익을 따라 거짓 신을 섬기는 것과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그것이 곧 이방인의 악과 다를 바 없는 악에 거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의 정신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세상에 증거할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할 도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보다 나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동일하게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힘으로 사는 악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심판해야 할 악한 자신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잊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거짓 것에 미혹되지 않을 것이고 약자를 괴롭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미혹하는 것은 거짓된 것임을 알 것이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소유한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자연히 약자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판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시한 채, 오직 세상에서의 잘됨을 좇고 자기 유익을 위해 신을 부른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동일하게 멸망의 존재로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시하고 잊은 자로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여김으로써 약자를 무시하는 것 또한 이방인과 동일한 악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함이 부족한 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부족하고 실천이 부족해서 심판을 받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아래 있지 않은 모든 자를 향하여 벌어질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시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보다는 자신의 행함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 또한 자신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방인과 동일한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자가 약자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참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