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6  예언하지 말라



<본문>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2:9-16  개정)



<설교>

성경에 구약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는 일에 지장이 있을까요? 사실 구약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구약이 없이 신약만 있어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는 지장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아모스를 살펴보고 있지만, 아모스가 성경에 없다고 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에는 지장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모스가 없다고 해서 믿음에 지장이 있다면, 아모스의 내용의 의미를 모른 채 죽은 신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구원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66권의 성경 전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얘기하는 성경 몇 권만 있어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66권 성경 전부를 알아야 예수를 믿게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을 봐야 하고 아모스나, 분량이 1장 밖에 되지 않은 오바댜도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구약을 통해서 인간의 실패와 악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초점을 인간의 구원에 두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재미없고 어려운 성경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냥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가 어떤가를 보게 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고 자랑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무능력과 악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구약이고 선지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선지서를 보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죄를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신자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을 믿음에 붙들어 놓은 능력의 손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을 두고 자랑할 것이 전혀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경은 신자를 이러한 고백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능력으로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9절에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키가 백향목처럼 크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진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이스라엘의 부강은 절대로 그들의 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힘이시고 그들의 근원이 되어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은혜 위에 보존 하시면서 원하신 것은 자신들을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게 하신 약자에 대한 그들의 태도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시 약자를 억압과 무시로 대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이방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존재했음을 의미한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시 이방인과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자로 여기고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러한 말은 이스라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앓고 신앙생활 자체가 없는 존재이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그 증거로 신앙생활 또한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과 똑같이 악한 존재로 취급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모스가 말하는 것은 외적인 신앙 행위가 신자와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고, 머리를 깍지 않으며,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써 구별된 삶을 서원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구별된 길을 감으로써 세상의 재미와 놀이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는 것도, 아무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귀를 거스리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야 선지자로서 대접을 받으며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니 예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거나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별하여 부르신 신자로서의 길 보다는 자신을 위한 삶을 원하는 이스라엘의 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부강해지고 더욱 힘을 가진 국가가 되어서 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그러한 본성이 약자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제사도 제물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슈퍼에 간 아이가 엄마의 손을 끌고 갖고 싶은 곳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서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은 대부분이 그런 식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한들 그것은 신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세상도 천국도 몽땅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알고 나니 세상이 시시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을 알고 나니 세상의 좋았던 것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알고 나니 잠시 잠간 후면 떠날 세상은 다만 잠시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곳으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비록 타인보다 많은 것이 수중에 있다고 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신자는 가난한 자, 약자로 하나님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이 신앙에는 강자와 약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만 잘하면 복을 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아모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했음에도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이 실상은 신앙과 상관없는 종교 생활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잘 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잘못된 생각이 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을 하는 자신을 보지 말고, 이방인과 동일한 본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는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면 신자라는 우리가 실상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악임을 깨닫는다면, 신자가 예수님 안에서 얻는 복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임을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