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예언하는 선지자



<본문>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 3:1-8 개정)


 


 


<설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한 곳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삶의 질이 인생을 차이 나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끝이 어딘가로 인해서 인생은 차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획하신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도받을 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여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 일에 관심을 둔 채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의 충돌입니다. 끝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헛된 현실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바램은 세상이란 현실에서 누리는 부요와 기쁨인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뜻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의 뜻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다가오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참으로 낯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행은 나와 함께 동행할 대상에 대해 알고, 동행할 분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여겼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서 이스라엘만을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신앙의 문제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화려한 신앙생활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변해 준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모스를 보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선지자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큰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나타남에서부터 이스라엘은 긴장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선지자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은 뭔가 움킨 것이 있고, 잡은 것이 있다는 증거인 것처럼 선지자의 나타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문제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목자였던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워 보냅니다. 이것은 당시 선지자라 이름하는 모든 자들이 엉터리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선지자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7:12,13절을 보면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아모스에게 아마샤라는 제사장이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유다 땅으로나 가서 예언을 하고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 위에 바로 선 이스라엘보다는 평안한 이스라엘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교회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말씀 위에 바르게 서는 교회보다는 평안하고 성장해가는 교회되기를 더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뜻에 동행하는 교회보다는 인간의 뜻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고 이러한 인간의 뜻을 돕는 하나님을 말할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동행이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인간과 동행하면서 인간의 뜻이 성취하도록 돕고 힘을 두고 인도하는 그런 하나님일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있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만 아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만 특별히 아셨다면, 이스라엘의 죄를 보응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더욱 돕고 함께 하셔서 지금보다 더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모든 족속가운데서 이스라엘만을 알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뜻이고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참된 진리의 길로 가도록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알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고 나에게 뜻을 두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별된 자리로 부름 받았고 구별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만 육신으로 사는 길로만 달려가지만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육신으로 사는 길이 아니라 영혼이 사는 길로 인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는 무엇보다 신앙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무시를 받는 낮은 자리에 처해진다고 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고, 하나님은 그 뜻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의해 인도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생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가? 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이 인도하기로 계획한 곳은 정해져 있고, 신자와 신자 아닌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대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되어질 일을 지금 현실에 미리 앞당겨 생각해 본다면 성공한 자로 부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살아있는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7장에서 아마샤가 아모스를 선견자로 부릅니다. 그때 아모스는 ‘나는 선지자가 아니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다’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인 아마샤가 자신을 선견자로 불러준다면 어쨌든 기분 좋을 일입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자신을 선지자가 아닌 목자로 소개합니다. 즉 아모스에게 직책이나 지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목사 되고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되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자신은 다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하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7장에 있는 내용인데, 이 내용대로 하나님께만 마음을 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의 외침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신자가 무엇이고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신자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었구나’라는 자신의 실상을 봐야 합니다. 나의 실상을 알게 된 그것이 깊은 탄식이 되어서 나와야 하고 탄식과 함께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가 아니라 나의 죽음의 자리가 될 것이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예수님이야 말로 떠날 수 없고 멀어질 수 없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살고 못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로서 참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나를 과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인 것입니다. 이 동행을 위해 하나님은 여러분께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