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5  증언의 말



<본문>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3:9-15 개정)


 


<설교>


우린 지금까지 아모스를 통해서 죄와 심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모스의 내용이 지금 시대 상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처럼 들려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요즘처럼 살기 힘든 때는 죄와 심판에 대한 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격려하고 위로하며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겠다는 것보다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등장한 것이 거짓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는 죄와 심판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평안하다’만을 외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게 하셨는가보다는 인간이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안위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하고자 하는 목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자기 안위의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신뢰를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람의 귀를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겠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주의 종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한마디로 자신의 안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9,10절을 보면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아스돗과 애굽은 이방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방 나라에 아모스를 보내서 그들에게 사마리아 산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사마리아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아모스를 보내서 책망하라고 하시면 되고,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라고 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이방인을 등장시켜서 사마리아의 죄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려고 하고, 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악을 인정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혹 나름대로 도덕적인 선을 행하는 사람이나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악함을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제 삼자를 통해 죄에 대해 책망을 받아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죄에 대해 책망하셨을 때 반발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누가 봐도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택한 선민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마귀 자식이라는 말까지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시각에서는 자기들이야 말로 철저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문둥병자나 소경 등 병자들도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여기고 멀리 합니다. 이 역시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거룩을 지키는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가까이 하고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일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바리새인을 본다면 그들을 참된 신앙인으로 인정할까요? 물론 이방인들도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들도 그들의 시각으로 판단할 뿐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이방인의 눈에 요란함과 학대함으로 비췬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죄인을 무시하고 천대하며 문둥병자와 같은 사람을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여기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눈에는 학대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가 바로 그런 형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는 이방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참된 신앙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이방인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로서의 구별성을 상실한 채 이방인의 죄와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고 따라서 그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했든 하나님을 그들의 열심과 정성을 거부한 채 이방인과 동일하게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이방인과 동일한 죄만 보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만의 독특성을 잃어버린 채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독특성이 증거될 수 있을까요? 때문에 이방나라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요란함과 학대함을 보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채 이방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신자가 모였기 때문에 세상의 모임과는 다른 독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을 부로 보지 않고 하늘의 것을 부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독특성이 존재하는 교회에서는 약자가 무시 받는 것이 없습니다. 땅의 것을 힘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모든 자가 약자로 모일 뿐입니다. 그래서 요란함도 학대함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과 다른 독특성입니다. 이 독특성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로 간주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취급됩니다. 아무리 나름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이 이스라엘을 건져냄, 즉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목자가 사자 입에서 건져낸 것은 양의 두 다리와 귀 조각일 뿐입니다. 즉 목자는 사자에게서 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양이 사자에게 잡혀 먹었다는 흔적, 증거물을 건져낸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다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심판을 받아 멸망한 그 흔적을, 증거물을 건져내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철저한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독특성, 구별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증거하지 못하고 이방인과 동일한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신앙생활에 속아서 자신들의 죄를 못하는 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13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듣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약과 같은 잠시 동안의 위로의 말, 귀를 즐겁게 하는 말입니까? 그러한 말들은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스스로 속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한 채 이방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결국 스스로는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그 모든 신앙들은 부인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자신에게 증언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죄가 낱낱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하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인정하는 자로 설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말씀이 즐거움이 되어 다가온다면 그것은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