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죄를 드러내심



<본문>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1-5)


 


 


<설교>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행함으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행함에 의해 좋은 믿음으로 칭찬을 받는다면 또한 행함에 의해 그 믿음이 추락할 때가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이 추락하지 않기 위해, 믿음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한결같은 행함을 유지해야 하고, 믿음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행함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사는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신자가 시선을 행함에 두게 되면 한 가지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럽고 통일성이 없이 다양한 행함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믿음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입니다. 모든 인간의 행함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한 변덕스럽습니다. 기도를 해도 시간의 양이 다르고, 기도하는 시간 역시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헌금을 해도 그 액수가 다릅니다. 그 액수 역시 기분과 감정에 따라 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만 하면 되고 헌금만 하면 된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기도의 시간과 헌금의 액수에 따라 믿음이 다르게 대우 받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행함을 무작정 믿음으로 밀어 붙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린 아모스를 보면서 신앙의 여부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나라까지 그 어느 때보다 부강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린다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죄를 지적받고 심판을 경고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산은 아주 비옥한 땅을 뜻합니다. 그렇게 보면 바산의 암소는 비옥한 땅에서 먹고 자람으로 살이 찐 암소로서, 이스라엘의 부요한 여자들로 볼 수 있고 이스라엘의 부요한 자들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산의 암소가 누구를 가리키든 문제는 부요한 자들의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악행입니다.



이들의 악행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가장에게까지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큰소리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이 구절의 ‘가장’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하지가 않아 해석이 조금 애매하기도 합니다. 바산의 암소를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 상류층 부인으로 보고 가장을 문자 그대로 그들의 남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힘없고 가난한 집의 가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당시 이스라엘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향한 부요한 자들의 학대와 핍박이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심판의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맹세하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의 그 어떤 신앙적 행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4절에서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신앙적 행위는 참으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 죄를 더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벧엘과 길갈에 가서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악행을 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서 여로보암이 세운 성소가 있는 곳이고,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에 열 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이러한 벧엘과 길갈은 모두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적으로 큰 상징이 되고 기념을 할 만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종교적 상징성을 띄고 있는 곳에서 무엇을 했을까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를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사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범죄하고 죄를 더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역시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바칠 정도로 대단한 신앙의 열심을 보였음을 뜻합니다. 지금의 교회에서라면 이러한 신앙은 분명 대단한 믿음으로 판단되면서 본받을만한 믿음으로 크게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이처럼 대단한 열심을 보인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면서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신앙적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실천의 열심으로 인해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으로 믿음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는 신앙의 기준을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경건을 실천하고 봉사의 열심이 있는 것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강조합니다. 또한 그러한 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무리한 열심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열심을 오히려 범죄를 더하는 것으로 평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열심 자체를 신앙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시는 이유가 그들의 도덕적인 타락이나 종교적 의식의 몰락이나 나태함 때문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칭찬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열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열심을 믿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를 더하는 악행으로 보셨다는 것이 우리가 주지해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교회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열심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사 1:13절에도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도 아모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경건으로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제사나 제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그들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사 1:16,17절의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는 내용에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악한 행실은 고아와 과부, 즉 약자를 학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악행과 동일합니다.



현대 교인들은 열심을 무조건 신앙으로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열심이 부족한 것은 신앙도 그만큼 부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열심을 강조합니다. 그 열심이 오히려 악을 쌓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오로지 교회를 위한 열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신자의 열심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성경에는 없는 말을 제멋대로 조작해서 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심을 악행을 쌓는 것으로 책망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분량으로 이해합니다. 열심이 많을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열심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복으로 보상 받는다고 믿고 열심을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을 위한 열심입니다.



아모스는 5절에서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는 말씀은 자기 기쁨을 위해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행했던 제사, 십일조를 바쳤던 것, 그 모든 열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쁨을 위한 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행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물론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너희들이 못 받은 은혜를 나는 받았다’는 자기 과시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의해 약자가 학대를 받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죄라고 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하나님으로부터는 악행을 쌓는 자로 책망을 받고 심판을 경고 받는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실천 몇 가지만 하면 신앙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실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본문의 말씀을 포함해서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복주는 그런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향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자기의 죄를 보는 마음입니다.



죄가 내게 있고 이 죄를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믿는 그 믿음이라면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를 사는 것이고, 이 세계에는 약자 강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죄인으로서 주를 소망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