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선지자의 애가



<본문>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 5;1-3)


 


 


<설교>


요즘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사고로 인해 죽거나 다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재해가 있고 사건 사고가 있는 곳에는 슬픈 울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거나 근심 걱정 없이 풍요롭게 잘 사는 곳에는 기쁨의 웃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재해나 사건 사고가 없이 풍요롭게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모스입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애가는 죽음을 슬퍼하는 장송곡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평온했습니다. 애가를 불러야 할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시적인 모습이었을 뿐 아모스의 눈에 비췬 이스라엘의 참된 현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이 덮쳐 있는 것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모스의 애가이며 이스라엘에게 경고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전혀 깨어있지 못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자신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고, 하나님과 문제가 있기는커녕 복을 받아 잘산다는 증거가 이스라엘의 부강으로 주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심판을 경고하고 죄를 책망하는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애가의 내용을 보면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고통을 예고한 것입니다. 천 명이 백 명이 되고 백 명이 열 명이 되는 상황은 이스라엘이 패망하여 무너질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 속에 남기시는 자가 있음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심판 또한 택한 자를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고 있으니 계속 복이 주어지고 부요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사가 상실된 종교적 실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형식적인 종교 행위였을 뿐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그들이 약자에 대해서는 학대와 핍박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와 제물의 규례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제사와 제물의 규례를 잘 실천하고 있는 자신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 비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는 선민이었을 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악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해야 할 이유도 없고, 책망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심판은 더욱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눈에 비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불렀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신들이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친들 그것은 종교일 뿐이지 신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의 참된 정신은 죄 없는 제물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통로, 또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교회의 외적인 부흥이나 세상에서의 복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신자라면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시고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단연코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감사가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곧 신자에게는 풍요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풍요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 또한 무너져야 할 욕망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로 사는 것입니까?



어떤 교회는 예배당 건축을 위해 부흥회를 하면서 ‘구원은 아무나 받지만 축복은 아무나 못 받는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헌금을 독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원의 가치까지 허물어뜨리는 사단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는다는 것은 교회만 나오면 구원은 받지만 축복은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는 안되고 헌금을 해야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행함이 헌금을 하는 신자의 행함보다 더 못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구원을 세상의 복보다 못한 것으로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 들 그것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자신이 신자임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하는 것일 뿐, 진심으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존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무엇을 한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들은 세상의 힘을 복으로 바라볼 뿐이지 하늘을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가난은 저주일 뿐이기에 가난한 사람은 신앙이 없고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한 사람으로 업신여김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현대인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아모스가 나타나서 현대 교회를 향해서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외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교회에 반감을 가진 미친 자의 말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열심히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고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쌓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참된 진리의 말을 들을 귀가 없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로 즐거워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향한 아모스의 애가는 오늘 우리를 향한 애가로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면 아모스처럼 세상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돈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복이 아니며, 제사하고 제물 바치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회개할 자는 바로 나 자신이고, 심판을 받아야 할 자도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로 인해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복을 누리는 신자입니다.



4절에 보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여호와를 찾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열심이 있었으나 여호와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 하나하나가 오늘 우리가 어떤 믿음에 머물러 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모스의 애가가 오늘 우리 자신을 향한 애가로 다가오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인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