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7  살 길



<본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5:4-17)


 


 


<설교>

하나님은 아모스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향해 애가를 지어 부르게 하시고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들이 살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살 길은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고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제사도 잘 드렸고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여호와를 찾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찾은 바 없이 여호와를 말하고 자기들의 것으로 헌신을 하는 종교인이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열심이 여호와를 찾고 섬기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나와서 나름대로 헌신한다고 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신앙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하나님을 찾는 신앙으로 여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슬프다 슬프다 하는 통곡소리가 모든 과장과 거리와 포도원에 울려 퍼질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가시는 것은 마치 애굽에 내린 장자 재앙 때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당시에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오직 죽음만 남았을 뿐이고 통곡 소리가 온 성에 넘쳤습니다. 이처럼 심판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나가실 때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모스를 세워서 증거하시는 이스라엘의 비참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자신들의 운명을 보지 못합니다. 주어진 평안의 환경을 즐기는 것이 전부일 뿐이지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합당하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평안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하늘의 생명입니까? 아니면 부요와 평안입니까? 생명과 부요와 평안, 전부를 원하시겠죠? 세상에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여러분께 그 모든 것이 악이라고 말하고 책망의 말을 하는 사람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그는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말로 인해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찾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신을 부요하고 풍요로운 복된 자로 만들어 줄 하나님을 원하고 찾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가려주신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선지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을 치는 목자였던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운 것도, 모든 선지자들이 사람이 싫어하는 말을 삼가는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평안만 외치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힘을 썼던 것입니다. 누구 하나 선지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모스를 세워서 선지자를 직무를 다하게 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벧엘이나 길갈은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브엘세바도 야곱이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종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곳을 찾지 말고 가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종교 중심지고 상징적 의미를 가진 곳이라고 해도 참 생명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만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언약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참된 정신은 언약궤에 정결한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죄가 용서되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인데 언약궤가 없는 벧엘이나 길갈을 찾아 제사하는 것은 용서의 은혜와 자비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제사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것으로 복 받으면 된다는 생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찾지 않고 오직 복을 위해 인간의 종교성만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며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예배와 행함들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신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예배가 무엇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다만 예배, 헌금, 기도와 같은 신앙 행위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을 받겠다는 발상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종교적 행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생명에 속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생명의 길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같은 종교적 열심을 앞세워서 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이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는 것이고 공의를 땅에 던져 버린 것이 됩니다.



14,15절을 보면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이 사는 길이고, 선을 구하는 것이 또한 사는 길이라면 여호와를 찾는 것과 선을 구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악을 구하기보다는 선을 구하며 삽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악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선은 도덕적 행함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행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임을 믿는다면 고난과 고통의 일이라고 해도 악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즉 세상의 시각에서는 불행이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시각에서는 하나님의 선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찾는 것과 인간이 추구하는 복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제사를 행하고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신 분임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는 믿음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세상은 고통의 일을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신자는 불행으로 보지 않고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의와 행함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만 심판에 해당된 자로 나와야 함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의와 행함으로 판단을 하게 되면 잘난 자와 못난 자로 구분하게 됩니다. 잘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하고, 못한 사람은 징계를 받는 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의기 굳게 서는 타락의 현장인 것입니다. 인간이 드러나고 자랑되면서 예수님의 의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한다는 명목으로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거짓된 신앙입니다.



교회는 종교 생활을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고 높이기 위에 모일 뿐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것도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복에 거한 자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살 길은 한 의로 오신 그리스도이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어지는 복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이 살 길이 아님을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만을 고집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교회됨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아모스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아픔이 되고 찔림이 되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면서 여호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살 길을 가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