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27  빗나간 예상



<본문>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 5:18-27)



 


 


<설교>


본문은 ‘화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에 나올 말이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말 일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화가 있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에 어울리는 것은, 비도덕적인 악행을 행했다거나, 제사와 제물 바치는 것을 팽개친 채 세상의 쾌락과 우상에 빠졌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으로 예상되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18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부터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로 부르면서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아니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왜 책망을 합니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한다면 오히려 칭찬을 받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이것부터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여호와의 날을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빛이어야 당연한데 왜 어둠이라고 말할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이나 계산, 예상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신앙의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서는 부지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말씀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실천이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가 외적인 실천을 신앙의 증거물로 제시하고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우리의 예상이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신앙의 문제도 우리 예상대로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실천하고 헌신을 했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 엎고 오히려 책망과 심판의 하나님으로 다가 오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고 말합니다.



사자를 피해서 도망을 쳤는데 곰을 만납니다. 또는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는데 뱀에 물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여호와의 날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희망의 날이고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자신들의 조상을 홍해를 건너게 하셔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들을 지켜주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고 구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기쁨이 아니라 고통의 날로 말하고,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비유하는 것이 19절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떨지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들을 어둠으로 밀어 넣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은 선지자의 책망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북스러워하고 배척을 해 버립니다.


 

14절에서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러분은 이 말을 여러분 자신을 향한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선을 구하지 않고 악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라는 뜻이 되는데, 과연 자신을 악을 구하는 자로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악을 구하며 살아간다고 쉽게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동안 실천하고 살아온 삶들이 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믿음으로 살고자 애를 썼던 것이고 또 도덕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자신들이 선이 아니라 악을 구하며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했다면 아모스더러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암 7:13절)’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결과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신은 악을 구하지도 않고, 또 신앙으로 살려고 힘을 쓰고 있는데, 악을 구한다고 하고 심판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에 싫어할 수밖에 없고 밀쳐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나 제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약자를 학대하는 그 마음 자체가 악을 구하는 마음이고, 또한 그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나 제물이 온전할 수도 없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평가를 이스라엘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착각과 오해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종교적인 행사는 부지런하지만 그것은 어둠에 갇힌 자를 구출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마음을 두지 않은 자의 종교적인 실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신다는 것을 선지서를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난 아니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자기 행함과 실천을 앞세우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도 당연히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자기 고집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는 빛의 길을 간다고 하지만 실상은 어둠에 있는 것이 됩니다.



21-23절을 읽어 보십시오. 한국교회가 그토록 외치는 신앙의 열심이 없는 것이 그들의 문제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절기를 지켰고, 성회를 지켰으며, 번제와 소제를 바쳤고 살진 희생의 화목제를 바치고 성가대를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런 열심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넘치는 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 모든 것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받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정의, 공의가 흐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에 흐르고 그 의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죽음에 들지 않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여정에 함께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로 인해 사는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의가 흐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의가 흐르고 있는 증거는 약자 앞에서 자신 또한 약자로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자를 학대하는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악행이 되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흐르고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 열심과 정성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의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선이 아니라 악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답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의가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그가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