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  선지자가 본 것



<본문>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암 7:1-9)


 


 


<설교>


신자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요?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려우니까 도와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드러나는 것은 망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세워진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는 자기 실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부정한 자기를 보게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포기하게 된 그 사람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가치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또한 그 자비와 인자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자와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실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신자는 단지 그 사실을 믿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세상 것입니다. 인자와 자비를 말하되 그 가치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인자와 자비의 가치에 무지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망해야 하는 인간의 실체를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서 그들을 부정함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장하고 있는 헛된 종교 생활에 매달려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인자와 자비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선지자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본 것을 이스라엘에게 증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닥칠 심판입니다. 아모스가 본 환상은 모두 네 가지인데, 본문에는 세 가지가 등장하고 8장에서 나머지 한 가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환상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또 어떤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희망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실체가 어떠한가를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그 사실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자신들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실체가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다윗의 영광이 회복된 것과 같은 부와 강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재가 그들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헛된 것일 뿐임을 알았어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도 증거물도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부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물로 여기면서 착각에 빠져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 붙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적당히 종교 생활 하면 구원을 받는 일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우리들을 아예 구원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드러냅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멈추지 않는 탐심이었음을 뿐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선지서입니다.

 


선지자가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으로 가득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포부를 갖게 하고, 희망을 심어주고, 힘을 내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으면서 인간에 대해 절망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절망의 자리에 내려가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의 가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자기 구원을 위한 당연한 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감격도 감사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신 환상을 그대로 증거하는 아모스를 이스라엘을 싫어했고 그 말 또한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인 아마샤는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는 말까지 합니다. 복을 받아 잘 사는데 괜히 그런 말로 불안을 조성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아모스가 아니더라도 선지자는 많았습니다. 선지자가 없어서 목자인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 선지자는 많은데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게 하신 것을 그대로 외칠 선지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는 다만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을 뿐이고, 시대 상황과 형편에 맞추어서 무작정 평안만을 외쳐대는 거짓 선지자들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인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생각하지 않고 복을 받아서 세상의 재미와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환상만 잔뜩 갖고 살 뿐입니다.



이러한 환상이 거두어지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실체를 보지 못하고서는 인간은 계속 착각에 빠져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지서는 우리의 환상과 착각을 깨뜨리고 속의 실체를 보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절망과 죽음으로 밀어 넣어서 그것이 우리의 참된 현실임을 보게 합니다. 이것이 선지서가 심판을 얘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2절을 보면 환상을 본 아모스가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애원합니다. 5절에서 두 번째 환상을 본 후에도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미약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겉모습은 미약한 것이 아니라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모스에게 참된 힘은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열심히 바치면서 여호와를 찾고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형식이었을 뿐입니다. 그 증거가 약자에 대한 학대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약자가 학대를 받았다는 것은 이방인과 똑같이 땅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자를 학대하면서도 그것이 악행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이야 말로 신앙의 껍데기만 갖고 있는 형식적인 신앙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이방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악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이야 말로 아모스에게는 미약한 존재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선지자의 시각에서는 크다고 해서 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의 수가 아니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말씀 안에서 인간의 실상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사는 길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고, 세상의 것으로 힘 있는 자 되는 것을 소원하지 않고, 큰 교회 만들어서 자기 보람으로 삼으려고 하지도 않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힘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워서 참된 힘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갇힌 우리를 건져 내는 하늘의 의가 참된 힘이고, 그 의로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세상은 이러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서도 그런 말은 환영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과 천국 양쪽 모두를 붙잡고 어느 한쪽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삭제한 가공된 십자가를 내어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에 맞는 길을 갑니다. 이런 현실에 선지서가 우리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말씀으로 다가오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욕망인가를 밝히고, 우리를 저주와 절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가 왜 귀한지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