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14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본문>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암 8:11-14)


 


 


<설교>



아모스 선지자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11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은 채 형식적인 신앙에만 치우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은 기근입니다. 기근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충분히 활용될만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때 기근을 이용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기근일 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근을 보내시는데 양식이 없어 주리는 기근이 아니고,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르는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두려움을 가질까요? 오히려 1,2장에서 말한 것처럼 불을 보내어 궁궐을 사르겠다는 것이 더 심판다운 무서운 말이 아닐까요?


 

인간은 자기 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필요로 하고 갈급해 하는 것도 몸을 지탱하는 일에 있어서 없으면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이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일에 있어서 없으면 안되는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힘 있는 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고 교양 있는 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몸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돈과 권력, 그리고 적절한 인격인 것이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듣기를 원한다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들으면 그것이 자기 몸을 복되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지 진심으로 말씀을 필요로 하는 갈급함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은 전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없으며 따라서 심판으로서의 효과도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몸이 고통을 받는 일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는 항상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듣지 못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해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나오고 있고,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는 말은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말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심판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했으니 벌 받아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고통이 아닙니다.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여호와께 마음을 두는 인간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여호와께 마음을 두는 척 하는 것뿐입니다.



심판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기 위해 실시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신앙생활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과,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지런히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행함을 근거로 하여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의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할 때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 저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신자일까요? 당연히 전자입니다. 그런데 심판에 대한 반응은 주로 후자에 머물고 있습니다.


 

복과 구원의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는 사람들은 행함과 실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오늘보다 내일 점차 더 나아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들은 구원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자기 몸을 자신이 책임지고 사는 것처럼 구원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믿음의 여부를 자신에게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여부를 자신에게서 확인하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믿음의 증거로 여기겠습니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행함밖에 없습니다. 행함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믿음을 확인하게 되고, 그 믿음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에 결국 자기 행함이 구원의 근거로 작용하는 결과가 됩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이 아모스서에 등장한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거부하시고 버리신다는 의미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십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일까요?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시 42:1-3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편 저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 심정에 공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의 고통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당연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는 고백이 심적으로 다가오지도 않고 공감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찾는 갈급함이 없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급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우리가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일상생활에 마음의 전부를 빼앗긴 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리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두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잘라냄이 있고 무너짐이 있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기존의 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 즉 긍휼과 자비를 마음에 담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창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얼마나 큰 심판인가를 알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구하고자 해도 구할 수 없는 기갈이야 말로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고 심판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그와 같습니다. 교회는 많고 말씀은 풍성한 것 같지만 참된 말씀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눈과 귀가 닫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찾고자 하는 열망도 갈급함도 없습니다. 다만 몸을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절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끝은 저주와 멸망일 뿐임을 생각한다면 말씀이 없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몸을 향한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으로 풍족합니다. 세상은 이 풍족에 붙들려서 땅의 것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씀은 무가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말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내게 들어와서 나를 다스리지 않으면 참된 것 보다는 세상의 풍족에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실상을 예견하기 때문에 말씀을 구하게 되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의 세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세상은 모래 위에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 풍족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여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는 무지함입니다. 이러한 무지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짓밟음으로써 우리의 악함이 드러날 때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가를 알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습니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의 부요가 행복이 아님을 알 것이고,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운 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은 성령이 오심으로 새롭게 생성된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인간상은 모두가 욕망이었음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는 원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는 적어도 주어진 현재의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향한 갈급함이 아니라 날마다 나의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하는 말씀에 갈급해 할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없는 기갈의 때를 고통스러워 할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셨던 새 이스라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