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15  이스라엘의 회복



<본문>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9:11-15)


 


<설교>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11절의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는 말씀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무너졌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무너뜨리셨는데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왕 다시 세우실 것을 왜 무너뜨리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생각은 등산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차피 다시 내려올 것 수고스럽게 왜 올라가느냐?’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산에 올라갈 때의 사람과 내려 올 때의 사람이 겉은 같지만 그 속은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하면서 그만큼 몸은 단련될 것이고 건강도 나아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정상에 올랐을 때의 느낌과 감정은 산에 오르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이스라엘과 다시 세우시는 이스라엘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다시 세우시는 이스라엘은 무너진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이스라엘은 다시는 뽑히는 일이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을 15절에서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다시 뽑히지 않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세움 받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너짐이 있어야 합니다. 무너짐이 없고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세움을 받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너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부지런한 신앙행위가 있었습니다. 제사를 열심히 드렸고 십일조는 삼일에 한 번씩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칭찬을 받을만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이방인과 동일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이유는 약자를 학대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약자를 학대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증거이고, 그것은 곧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산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약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들을 힘없는 자로 본다는 뜻이고, 약자를 힘없는 자로 보는 것은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자를 힘없는 자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학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본다면 약자의 형편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약자를 학대한다면 그것은 약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약자에 대한 학대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에 가치를 두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면서도 이방인과 동일한 심판이 선포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들어도 여러분의 마음은 크게 찔리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자를 학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약자를 학대한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TV에서 방송된 것처럼 정신지체나 노인을 수십 년씩 종처럼 부리면서도 임금도 주지 않고 짐승 우리와 같은 곳에서 기거하게 하는 학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과 윤리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약자를 학대하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들어도 마음은 떳떳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마음이라면 지금까지 들을 아모스의 내용은 헛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신자는 아모스를 대하면서 자신의 무너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무너짐은 없게 됩니다.



자신의 무너짐이 없이는 뽑히지 않는 새로운 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자에게 자신의 무너짐은 말씀 안에서 있어야 할 필연적인 경험으로 다가와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모스를 통해서 ‘내가 약자를 학대하는 그런 인간이었구나. 이런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애통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학대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약자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무리들에 대해서 아무런 대항도 못하는 힘없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학대를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는 고통으로만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학대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서 무리들과 제사장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해 보라’고 조롱합니다. ‘네가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어주겠다고 조롱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한 학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무엇과 같습니까? ‘네가 믿어서 잘된 것이 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학대인데 이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신자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고 있는 예수님을 학대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학대가 교회에 만연합니다. 가난한 신자는 마치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학대요 조롱이며 부자를 복 받은 자로 간주하며 차별을 두는 것 역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지금까지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복음만 가지고는 목회가 안된다거나 교회가 안된다는 말이 복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힘이 되어주기를 원하고 강한 자로 세워주기를 원하는 욕망이 영생을 위해 주어진 복음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입니다. 복음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학대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열심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신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선고 받은 이스라엘과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말을 들으면서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해야 하고 이런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무너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말씀은 우리를 무너뜨립니까? 그것은 지금의 나 됨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이스라엘이 바로 이들입니다. 자신을 보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무너뜨리고, 대신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악함을 예수님의 피로 가리시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땅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 땅에서 신자는 자신의 악함 때문에 뽑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사는 신자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만을 증거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게 하시면서 무너뜨리십니다.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말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무너뜨리시고 대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만 보면서 세상의 것이 많이 주어지는 것을 사랑과 은혜로 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무너짐과 실패의 자리에서 보게 되는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에게 참된 힘과 위로가 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