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 10강

하나님을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버릇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뭘 요구해도 언제나 나에게 좋은 쪽으로만 요구하고,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일하십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마음대로 일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의 행동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해도 세세하게 열심히 기도하면 더 들어주신다고 말합鎨. 교회 일에 소홀히 하면 하나님은 화를 내시고, 십일조를 안하면 물질에 손해가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실하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구약 때부터 약속하신 것으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죄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해결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인간의 끊임없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셨을 때 그것이 나에게 어떤 고통이고 어려움이든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세상 일은 내가 내 힘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내 마음에 맞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일을 가지고 너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고 여러분의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에 내 편에서 아무리 걱정하고 염려해도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하나님이 마음대로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니엘의 세친구인 사드락, 메삭, 야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짐 받을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에 넣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한 다니엘의 세친구으 螡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풀무에 던지려면 던져라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존심 때문도 아니고 오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친구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다니엘서 설교를 시직할 때 다니엘서가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시긱 위해서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셨고, 그 속에서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친구를 들어서 그들을 통해 바벨론과 이스라엘에게 세상으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를 믿는 것이 영원히 살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 세친구는 이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지 결코 바벨론의 힘 때문에 포로된 것이 아님을 안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기들이 남의 나라에 포로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포로된 신세를 한탄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시각의 차이가 그들의 태도도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들이 포로된 것으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았다면 그들은 느부갓네살이라는 세상으 힘과 권력 앞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풀무불을 가지고 협박할 때 그들은 신상에게 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포로된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봤을 때 그들은 느부갓네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세상의 힘도, 풀무불도 두려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자기들이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렸지 결코 느부갓네살의 힘에 달린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