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들 (단 3:19-27) - 11강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쉽게 하고 또 많이 하고 있는데 진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고, 세상에서 잘 사는 문제보다는 마지막 때 예수님께 부인당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참된 믿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땅의 것은 우리가 일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땀흘려서 열심히 일해서 우리의 손으로 거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일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기도의 대가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되돌려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은혜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세상을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주장하며 살지 않고 예수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세상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계획과 힘을 가지고 개척해 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 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없이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타협이 등장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세상으 지배를 받는 모습인 것입鎨.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앤생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됨을 알 때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언제나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자이고, 순종하지 않느 자는 그 어떤 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는 옳은데 모두 저 사람이 틀렸다는 생각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이며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니엘의 세친구가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을 하지 않음으로 느부갓네살의 명령대로 풀무불 속에 던짐 받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는 결박을 당하여 던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풀무 안에 보니까 네 사람이 풀무 안을 자유롭게 다니는데 그들 모두가 결박되지 않은 채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세 사람을 풀무에 던진 것은 자기 힘의 과시입니다. 자기의 힘에 도전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풀무에서 죽지 않고 오히려 결박이 풀린 채로 자유롭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이 있는데 그 모양이 신들의 아들 같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내용은 지금까지 이 세사람이 누구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었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실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잘못된 것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으로 오게 하셨고 그것이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서 일하신다는 증거인데 우리가 세상의 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 곳도 하나님의 일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세 사람의 믿음, 즉 이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풀무에 네 번째 사람이 등장해서 다니엘의 세친구와 함께 자유롭게 풀무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풀무에서 살리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풀무에 던짐 받지 않도록 조처했어야 당연합니다. 또 이들의 믿음이 좋아서 불속에서도 안 죽고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 번째 사람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사람을 통해서 이들이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기에 세상의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풀무의 위협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네 번째 사람, 신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 굴복하여 살아갑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면 용납해 버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를 잘되게 하는 조건들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잠시 왔다가 가는 나그네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를 감당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거부하겠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믿음을 말하면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지금 내 인생 속에서 나를 다스리는 말씀으로는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지 세상에서 살 때는 현실적으로 따져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에게 좋은 쪽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에 말씀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말씀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가려지고 언제나 옳은 쪽으로 가고자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소에 나를 다스리시고 나와 함께 하셨던 네 번째 사람, 신의 아들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