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nter>꿈과 두려움 (단 4:1-7) - 13강

세상은 자기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가차없이 거부하고 버리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붙드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종교들이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변질되어 내려온 것도 사실입니다. 한 예로 얼마전 T.V에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 범종교인 기원식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가 한국이라는 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종교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에서도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름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한국이라는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뭔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세상적인 시각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짐을 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쪽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혼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세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알게 된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자를 풀무에서도 죽지 않게 건지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세친구의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2절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풀무에서도 타죽지 않은 세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이적에 대해서 반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그런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를 입은 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능하신 기사와 이적이 함께 하는 나라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느부갓네살의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심방해서 이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느부갓네살과 같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이 두려워하고 번민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꿈 때문입니다. 그 꿈을 애굽의 박사들, 박수, 술객, 점쟁이들이 해석하려고 하지만 해석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시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주신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데도 바벨론의 박사들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꿈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에게 네가 바라는 미래는 잘못됐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꿈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꿈을 통한 느부갓네살의 두려움과 번민입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과 번민이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바라고 꿈꾸고 있던 미래를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 때 세상은 그 신자를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교회들은 믿음으로 살면 세상에서 잘된다는 괴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그 믿음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과 충돌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믿음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를 두고 어느 한쪽으로 가야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충돌되고 서로 융화할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믿음은 세상에서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세상의 일이 안될 때 이들은 기독교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움이 안되는 예수는 필요 없다 하면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믿음과 현실이 왜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꿈을 자기들의 이해와 사고로서만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이 세상은 장차 무너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할 것임을 나타내십니다. 세상의 것은 헛되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스스로를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손에 쥐고 있을수록 힘이 되고 세상의 것만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세상을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꿈으로, 자신의 목적으로, 자신의 소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현실과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사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데만 꼭 있어야 할 분이십니다. 느부갓네살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지 마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을 진심으로 원하면서 세상에서의 잠시 잠간의 고난도 괴로움도 이겨 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