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해석 (단 4:19-27) - 15강

사람들은 너 나 할 것없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만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원하는 성공은 여러 가지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크고 잘되는 번창하는 성공이 있습니다. 또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성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효도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에 대한 성공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 자녀가 장성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를 맞이하는 성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이 들어서 늙었을 때는 이제 성공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소위 곱게 늙어 가는 성공이 있고, 또 죽을 때 병으로 고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 힘들게 하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죽음에 대한 성공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성공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고 잘되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내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결국 성공을 기대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이 나에게서부터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내 자식이고 내 가정이지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느냐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내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는 기도를 섣불리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소원과 내 인생을 조금씩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맡겨갈 때 그것이 곧 신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무기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다는 다 알고 계시니까 처음부터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없다는 것으로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에 대한 절망이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란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쓰면서 결국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며 동시에 그 절망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세상의 관심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자신이 발견한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세상 영광을 다 버리시고 오히려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신자들이 할 일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우리가 보여줘야 할 신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잘 되가지고 '저 사람은 교회 잘 다니고 십일조 잘하더니 복받아서 저렇게 잘됐다'는 칭송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한 자기 자랑이고 자기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고 모든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믿음도, 인생도, 성공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의 영광과는 상관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성공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진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게서는 편하게 죽는 그런 모습까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성공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우는 자가 곧 신자요, 이것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들은 십자가 아닌 것을 십자가로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 버리고, 헌금 많이 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버리고, 교회 부흥하는 것을 십자가로 바꿔버립니다. 십자가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돈으로, 성공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강한 힘을 소유하고자 하지만 정작 성경은 믿음은 오히려 강한 힘을 버리고 약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강한 힘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돌아가시는 약한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힘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의 힘이 나를 통해서 보여질 수 있도록 나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원하십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곧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다니엘 세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은 발견했지만 그 권능을 자기 인생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조건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의도대로 자기가 만들어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꿈에서 큰 나무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상상할 때 느부갓네살과 같이 큰 나무로 만들어 가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님을 느부갓네살과 같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는 신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네 인생은 나에게 달렸지 네 마음대로 너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느부갓네살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 느부갓네살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곧 나에 대한 책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계획이 많습니다. 자식을 보면서도 과학자를 만들까, 검사를 만들까 하면서 자신만의 계획을 수없이 세워갑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속마음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달라는 욕심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냥 공부시키면서 자식의 재능에 따라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공부가 십자가가 아니니까 하나님만 잘 믿는 자식으로 키워가겠다는 소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걱정과 염려가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일 일, 장래 일은 모두 여호와의 손에 달렸으니까 네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느부갓네살에게 인생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꿈을 꾸게 합니다. 그 꿈은 땅 한가운데 견고하고 큰 나무가 있는데 순찰자가 와서 그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꿈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바로 자기가 원하고 계획하던 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인지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꿈을 해석할 자는 느부갓네살과 반대의 생각을 가진 자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니엘이 등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올 때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서 있기를 소원했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이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나무를 잘라버리십니다. 즉 우리 스스로 계획하고 소원하는, 우리가 원하는 성공을 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잘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실 때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성공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그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되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도 힘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힘이고, 모든 것을 자기 함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는데 힘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자가 받는 수모과 멸시를 알고 있기 때문에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것을 잘라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잘라지는 것이 곧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나무를 자르시되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인생도 모두 그 분의 손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잘라진 그루터기가 다시 소생하는 것, 이것이 곧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의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자가 성공자입니까? 나사로가 성공자입니까? 분명히 나사로가 성공자입니다. 세상 편에서 볼 때는 실패자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분명 성공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세상 편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봐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라면 결국 우리가 기대해야 할 성공의 모습도 당연합니다. 내 성공을 앞세울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성공하신 분이라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동행하는 것이 곧 성공하는 삶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