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응하다 (단 4:28-33) - 16강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왕은 세상에서 영광을 기대하고 성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옛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나 자신을 책망하고 나의 잘못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은 왕인데 나는 지금 대통령도 아니고 장관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니까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의 역사가 왕을 대표로 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그 나라의 대표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왕의 잘못을 모든 백성의 잘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느부갓네살과 지금의 내가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이 말씀은 다른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소망이 무엇이었는가를 꿈에서 큰 나무를 등장시켜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잘라 버리심으로 인간의 모든 장래는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가 어떤 계획을 세워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뭔가 성공을 이뤄보겠다는 것은 내가 내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할 때 기대하는 것은 성공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에는 꼭 영광이라는 것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자기가 땀흘려서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은 영광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이 잘해서 그 결과로 내가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별로 자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한 일에 대해서는 영광이라는 것으로 회수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에 값비싼 물품을 한 성도가 바쳤을 때 그 성도는 교회에 나오면서 그 물품을 볼 때마다 '저것은 내가 바친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나중에 그 물품이 낡아져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도 함부로 바꾸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물품을 바친 신자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목사들끼리 대화할 때 흔히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평생 예배당을 하나 건축하는 것이 소망이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라면 예배당을 하나쯤은 지어놓고 죽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 목사가 예배당을 건축했다고 합시다. 그 목사가 예배당을 바라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 예배당은 내가 수고하고 땀흘려서 지은 것이다는 생각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버리기에 힘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 본성이 이런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이런 생각이 들 때 자신의 죄인 됨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자기에 대해서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죄인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고 주님을 붙드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좋은 결과를 반드시 거두겠다는 것이 곧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죄인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자리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모든 인생이 다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꼭 불만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열심히 봉사하고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러면 우리가 왜 봉사하고 수고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일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도왔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수고하고 일했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수고하고 힘 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의지로 일하는 사람은 일의 공로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성령의 시키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만 받고 누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삶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수시로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내 공로이고, 내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내것을 잘라 버리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건설한 바벨론이란 큰 나라를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짐승같이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합니다. 25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공로로, 자기의 영광으로 삼는 것을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 자기 공로를 포기하도록 무너뜨리고 부숴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느부갓네살은 짐승같이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느부갓네살을 짐승 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십니까? 짐승이란 하나님의 저주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수를 66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수를 666이라고 말하는 것은 짐승이란 어떤 자인가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완성은 칠일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모든 창조를 마쳤다고 말씀합니다. 일곱째 날이 복된 것은 6일까지 창조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런데 6일까지의 모든 세상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노력을 주장하고 힘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짐승이고 그 수가 666이다는 것입니다. 14장에는 144,000이 나오는데 이것은 666과 반대로 장차 세상을 다스릴 시온 산의 성도를 말합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신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무엇이 저주받은 짐승의 모습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고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을 찾고자 하는 것이 곧 짐승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지금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내 힘이다고 말하는 것이 곧 짐승의 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곧 144,000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언제나 무엇인가 세우고 이루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라내고 부서뜨리기 위해서 힘 쓸 것입니다. 날마다 내가 내 힘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이 무너지고 잘라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시온 산의 성도의 자리에서 세상을 다스릴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