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좋은가 (단 5:1-9) - 18강

마태복음 6:21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곧 나에게는 보물로 자리하게 되고 결국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중심으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에게 십자가가 귀합니까? 돈이 귀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당연히 십자가가 귀하다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삶이 십자가가 중심이 아니라 돈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귀한 것이 아니고 돈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서는 말씀을 들을 때는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 같다가도 또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구원 얻는 생명이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왜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가 영원한 생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썩어질 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갑니까? 세상의 생명이 삶의 중심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상에서 내 몸을 위해서 할 일 다해놓고 남은 시간에 주님을 섬겨보겠다고, 말씀 듣겠다고 나오는 모습이 과연 신앙입니까?

옛말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멀리 있는 것보다 현재 나를 지켜주고 세상의 것을 제공해 주는 힘을 믿겠다는 얘기입니다. 즉 사람들은 멀리 있는 힘보다는 지금 나와 가깝게 있는 힘을 더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신자들은 천국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는 것 때문에 몽땅 눈앞의 현재의 문제만 바라보면서 십자가도 무시하고, 주님도 무시하고, 내 좋을 대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먹이 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 같이 나중에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심판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멸망이라는, 심판이라는 약속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전혀 무서울 것이 없이 살아가는 벨사살이라는 왕이 어떤 일로 인해서 두려움에 가득 차게 된 내용입니다. 벨사살 왕이 큰 잔치를 베풀어서 술을 마시다가 자기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 즉 성전에서 쓰이던 기구를 가져다가 술잔을 삼아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 그것을 보고 벨사살 왕이 두려워서 떨게 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고 합니다. 벨사살이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벨사살 왕이 건방지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쓰이는 기물을 가지고 술을 마시다가 혼이 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기구들은 다 거룩한 성물이니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성경과도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당신의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오늘 벨사살 왕에게 하시는 말씀도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벨사살 왕에게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며 벨사살 왕을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를 사용해서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고 합니다. 벨사살의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신보다도 약하다, 우리의 신이 제일이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태도였던 것입니다. 즉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성전을 지키시고,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서 성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성전을 무시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셨다면 지금도 하나님은 그 성전 역할을 하는 것을 중심으로 일하실 것이고, 우리가 만약 그것을 무시하고 모독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허락하신 것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고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제사가 형식으로 되어갔습니다. 성전 중심,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이방인과 같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되고 성전은 무너지는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면 우리에게 지금 성전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아서 내가 과연 그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전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곧 우리의 생명 되시기 때문에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곧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고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삶을 살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중심으로 그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주어진 생명을 알고 그것으로 족한 삶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중심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내 중심으로 살아갈 때 그것은 벨사살과 같이 성전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중심입니까? 사람은 자기에게 중심이 되는 쪽으로 움직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직장이 중심이 되면 직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학교가 중심이면 학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녀가 중심이면 자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를 짐승으로 취급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중심으로 움직였던 느부갓네살을 짐승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통하여 성전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자는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전 되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