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있는 사람 (단 5:10-16) - 19강

세상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선한 일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신 일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들도 선하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만 내 자신의 문제로 발생하면 그 하나님의 뜻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기도를 한다거나 성경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들도 있어야 합니다. 단지 이런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은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업을 하거나 목회를 할 때 자기 스스로 이런 교회를 만들고, 이런 사업체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모든 계획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는 그 계획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인간편에서 모든 계획을 다 세워놓고 그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어디에서 체험을 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본문의 벨사살 왕은 손가락이 쓴 글씨를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벨사살에게 글씨를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를 보이신 계시입니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 갈 뿐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 증거는 성경을 향한 여러분의 관심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벨사살 왕은 손가락의 글씨를 보면서도 그 글씨를 읽지도 못하고 해석을 하지도 못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서도 해석을 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두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는 영이 있는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다니엘을 신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이 있는 사람과 영이 없는 사람이 말씀을 해석할 때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이 있는 사람이 말씀을 해석할 때는 꼭 말씀이 세상을 공격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세상을 공격한다는 것은 곧 나를 공격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되고 그 세상과 함께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애착을 지적하며 죄를 드러냅니다. 말씀을 통해서 이 죄를 깨닫는 것이 곧 영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손가락이 쓴 말씀도 벨사살 왕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세상 나라를 자기 힘으로 삼고 예루살렘의 성전의 기구를 술잔을 삼아서 술을 마실 정도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벨사살을 지적하는 것이 손가락이 쓴 글씨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애착심을 가지고 될 때 그 앞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시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책망하는 하고 지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손가락의 글씨를 보고 뭔가 자기를 치는 듯한 느낌을 가지며 두려운 마음을 가지듯이 신자는 언제나 말씀 앞에서는 그 말씀이 자기를 친다는 것을 잊지 않고 두려움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말씀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려고 하는데 우리는 자꾸 세상의 것으로 자기를 가리려고만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자가 신자인데도 사람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서 자기의 부족함을 메우고 가리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있어야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맨 처음 한 일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최초로 한 행동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대신 짐승의 가죽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게 했습니다. 결국 죄인된 인간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벨사살에게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게 된 것은 자기 나라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무시한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세상의 것을 믿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를 무가치한 나라로 여기는 그런 모습은 아닌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