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금령 (단 6:1-10) - 22강

신자가 예수님의 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야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해달라, 주님만 바라보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그 말도 내가 진심으로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교회 문만 나서면 금방 드러나 버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해서 하는 말이라면 세상에 나가 살면서 끊임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소 세상에서 결국 뭔가를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 교회에 나와서 주님 말씀 듣고, 주님 부르면서 '주님 이 죄인을 도와주소서'라는 애통함과 탄식이 담긴 절박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아예 없이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서 기도는 그럴듯하게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해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을 두며 자기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종으로 살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종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하면 몹시 불편해 합니다. 애당초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종의 삶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종에 대해서 들을 때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데 자꾸 거론하니까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지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경을 들은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가 자신의 죄를 지적 받는 시간이 되어야지 만약 성경을 듣고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됨을 발견해가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자세로 들을 때 우리에게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 수 있고, 우리는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벨사살 왕이 죽은 뒤에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처럼 메데 사람 다리오에게 왕권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두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어서 자기에게 손해가 없게 합니다. 그 총리 셋 중에 하나가 다니엘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총리 일을 잘 수행한 이유로 왕이 다니엘을 내세워서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자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니엘을 고소하려고 허물을 찾지만 도저히 허물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허물을 찾고자 해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외에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그것을 허락하고 어인을 찍어서 전국에 공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다니엘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기도했다는 것이 중점이 아닙니다.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 자신은 세상 왕의 종이 아니다는 다니엘의 행동입니다. 다니엘이 금령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지 왕의 종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총리 일을 열심히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왕의 신하로서 일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알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한다는 것을 총리 일을 열심히 한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총리라는 일을 자기의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총리라는 일이 다니엘에게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다니엘은 총리의 신하로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금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총리라는 직책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리라는 직책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금령에 굴하지 않고 평소에 하던 기도를 계속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종으로 세상을 사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생존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주님의 종된 모습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생존 문제에 연연해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이 자기를 살린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움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직업에 붙들려 있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세상에 살고 있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있고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살고 있느냐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계 수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 세상을 살아가는 생계 수단으로 삼아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생계 수단으로 삼아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생계수단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나에게 있는 것이 적다고 여겨지고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의 생존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다니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신자의 삶은 그러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생존 문제에 매여있지 않고 의의 문제에 붙들려서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을 생존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겨진 존재임을 날마다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종으로 세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