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와 다니엘 (단 6:11-18) - 23강

신자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에 가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으나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 편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신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성경적으로 전혀 점검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는 신앙생활이 성경에 근거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앎이나, 체험이나, 신앙 상식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모든 것들이 성경으로 점검된 것들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상식을 믿어버리기 때문에 성경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대한 것은 소홀히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 오래 다닌 신자일수록 자신의 상식과 고정 관념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것을 두고 생각할 때도 이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문제로 여기시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 가는 문제를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신 것은 천국에 들여보내시기 위한 목적이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것이 과연 단지 천국에 들여보내시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까? 세상에 남겨 놓으실 필요없이 빨리 천국에 가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은 가나안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자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기존의 가나안 거민들이 보였던 모습과 동일하게 산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거민과 마찬가지로 그 땅에서 토함을 받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이 땅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증인이 되라는 말씀의 의미는 밖에 나가서 예수를 안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신자가 천국에는 관심을 두고 살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산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할 일만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 대한 문제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천국에 대한 오직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천국 보내든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누구를 지옥에 보내든 천국에 보내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없습니다. 또 천국에 가보겠다고 뭔가를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신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한 것이 있는데도 지옥에 보내신다면 당연히 항변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다는데에는 뭐라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느냐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뭘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킨 대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시킨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증인은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신약의 증인은 이 땅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증인된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만든 금령 때문에 사자굴이라고 하는 죽음의 자리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기 전에 살려내기 위해서 애를 쓴 다리오 왕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살리고 싶어했지만 결국 사자굴에 집어넣은 것은 왕으로서 권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왕이 친히 왕의 도장을 찍어서 공포한 금령인데 왕이 스스로 어기면 백성들이 왕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식의 신하들의 말에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살리고자 하면서도 살리지를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다리오 왕의 잘못이 뭐냐면 왕이라고 하는 권위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권위로 여기고 스스로 그 권위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위가 있어야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다니엘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리오의 신하들이 잘못했다고 따지는 것은 자기들이 만든 금령을 어긴 것인데 그것이 잘못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평소 하던 대로 기도하는 것 때문에 세상에 의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다니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고 계시는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만든 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잘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인간들이 만든 법을 가지고 잘잘못을 판단합니다. 성경에 비추어서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법에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리오의 경우를 보더라도 다니엘을 살리고자 한다면 자기가 만든 법을 취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 스스로 매여버리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매여 사는 모습, 이것이 다리오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법에도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자유인이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법에 매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내 할 일을 안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도 분명히 총리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총리라는 직에 매어서, 즉 총리라는 것을 자신의 권위나 출세의 도구나 생존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총리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다니엘은 하나님만 섬길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령이 선포되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평소에 하던 대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를 얻은 자의 모습입니다. 직업에 매이지 않는 모습, 직업에 매인다는 것은 그 직업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그 직장에 매여 살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교회에 매여서 신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목회를 하는 것도 교회를, 목회를 자기의 생존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에 매이고, 교회에 매이고, 돈에 매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유롭게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세상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매여서 살아가는데 증인만큼은 세상에 매이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오직 주님께만 매이고 세상에는 매이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직장에 매이고, 사람에 매이고, 법에 매이고, 돈에 매여 사는 모습들만 보여집니다. 이것은 진리 안에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도 영향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만 매이는 자, 그 자가 증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