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세 (단 7:9-14) - 26강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고, 하나님 외에는 내 힘으로 삼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만큼은 여러분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에 항상 동의하는가? 나는 하나님 외에는 내 힘으로 삼는 것이 없는가?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스스로 고백하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해서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왔고, 교회 일도 남들 못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게 살아야 하느냐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피조물'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을 때 인간은 피조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은 자신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고 창조주에게 그 가치에 맞는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의 마음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할 때 자신에 대한 가치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또는 장로와 권사 등을 교회의 일꾼이고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직책과 열심에 의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교회는 달리 기둥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교회의 기둥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느 특정 인물에 의해서 유지되고 존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단체이지 결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교회는 결코 쇠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내걸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하신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 어떤 가치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멸망하시는 그 일까지도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꿈을 통하여 세상은 멸망당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꾼 네 마리의 짐승은 세상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네 번째 짐승은 가장 강대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멸망해 버리신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먼 나중의 일로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 될 것 같습니까? 오늘 당장 세상이 멸망당해도 전혀 아쉬운 마음없이 멸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혹시 지금까지 자기가 열심히 살아온 세상의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은 없습니까?

롯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치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 아쉬운 마음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으로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멸망을 아는 자는 세상에 붙들려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멸망할 것이니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현실에 충실하면서 살아가지만 단지 세상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자기를 살린다고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마음이 그 나라와 그 의를 향해있던 신자라면 세상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인입니다. 11절에 옛적부터 계신 이가 짐승을 죽인다는 것은 세상 나라를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내가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라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멸망은 곧 나의 멸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멸망하시겠다는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입니다.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 멸망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선한 존재가 못되고, 선한 존재가 아닌데 나에게 가치를 둔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 항상 죄인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심판을 받은 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3절을 보면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페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12절에서는 짐승이 빼앗김을 당하는데 14절에서는 인자 같은 이에게 영원한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즉 빼앗김을 당하는 권세와 영원한 권세가 등장을 합니다.

빼앗김을 당하는 권세는 세상의 권세입니다.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사람들은 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빼앗겨 버릴 권세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원한 권세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권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를 믿지 말고 예수님의 권세를 믿자는 것은 세상권세에는 우리를 살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의 권세를 믿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사라지고 빼앗겨 버릴 권세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죽은 자도 살리는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신자라면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영원하지 않는 세상에 붙들려서 살아갑니까? 세상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먼 미래의 일로만, 막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내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는 날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에 붙들려 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지도 못하는 세상의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영원한 인자의 나라,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산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