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진상 (단 7:15-28) - 27강

지난 시간에 세상에는 두 권세가 있는데 하나는 빼앗기고 사라질 권세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권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권세는 모두 다 짐승의 나라인 세상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는데 필요한 권세이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권세이고, 주님이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권세가 영원한 권세인 것입니다. 그 권세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아니고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사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한가지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그 특징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자신의 앞으로 인생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지 못할 때 불안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녀의 앞으로의 인생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할 때 자연히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요구조건을 갖추지 못할 때 자연히 불안함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안함은 남들보다 뒤떨어지고, 세상의 힘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신자들과 상관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에게 이런 불안함이 있고, 염려가 있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이 꿈을 꾸는데 네 짐승이 나오고, 그 짐승들은 강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짐승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죽이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다니엘의 꿈은 한마디로 이 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주는 꿈입니다.

17절부터 보면 네 짐승은 네 왕인데 큰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힘센 한 왕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핍박하고 짓밟게 되는데 그 기간이 한때, 두때, 반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왕을 이길 수 있는 분이 오셔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때 그 나라가 망하고 영원한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장래 일은 '너는 장차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두려워 마라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분이 오셔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믿음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의해서 이 땅은 거짓된 교회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 거짓 된 교회에 의해서 참된 신자들이 무시당하고 조롱 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굳이 세상을 이렇게 믿음을 지키기 힘든 환경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신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심판하는 구분입니다. 그 힘든 때가 한때, 두때, 반때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때, 두때, 반때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합하면 세때 반이 됩니다. 세때 반의 의미는 요한 계시록 11:8,9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11절에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바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한때 두때 반때란 주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수난을 그대로 이어 받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주님이 당하신 그 수난의 길에 동참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 일 반 후에는 모든 고통이 끝나고 하나님의 음성속에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 곧 신자에게 주어진 장래일 입니다.

본문 26절, 27절에서도 심판이 시작되면 세상 권세는 빼앗기고 천하 열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붙인바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장래입니다. 우리는 이 장래 일을 분명히 알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심판 속에 들어갈 운명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했던 신자들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을 내가 살아가야 할 장소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된 결과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반응은 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있느냐'고 찾으실 때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최초로 두려움을 가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의 두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즉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아담의 장래는 그 여자의 후손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장래가 여자의 후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후손을 기대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번성하고 크게 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가 바라볼 것은 생명 되신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돈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온천하를 주고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신다면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심판이고 영원한 것은 주님의 나라인 것을 분명히 하시고 천국을 보장받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