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까지 (단 8:9-14) - 29강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쪽, 즉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일을 해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지 손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간이 보여왔던 선악 체계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선이고,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것은 악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악체계속에서 인간이 살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이 일이 지금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자신에게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이러한 선악체계는 보여지게 마련입니다. 국가의 법에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법이 있습니다. 국가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모두 법으로 금지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국가를 해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힘이 있어야 하는 데 그 힘을 방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그 국가에 속해 있는 모든 존재, 그것이 단체이든 어떤 사업체이든, 또는 기관이든 요구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그러한 요구사항은 종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국가가 요구하는 종교는 국가에 이익이 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모든 종교가 힘을 합하는 것입니다. 힘을 합해서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백성들의 정신적인 인도자로서 일해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국가 시책을 적극 환영하고 인정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종교계에서도 심심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가 힘을 합해서 국가 발전과 통일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생각은 종교도 국가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니엘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국가는 짐승의 나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짐승의 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이 국가만의 생각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봐도 우리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나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모습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종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 원하는 것은 힘이기 때문에 힘이 안되는 것은 거부하고 없애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라고 합니다. 지금 그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나라가 등장을 합니다. 군대의 주재(하나님)를 대적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11절에서 제사를 제하여 버리고 그의 성소를 헐어 버립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런 내용을 보면 뭔가 불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왜 꼭 하나님 쪽이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갈등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내가서야 할 곳은 하나님 쪽인데 원하는 것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강한 힘으로 남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것이 신앙의 크나큰 문제입니다.

그러면 강한 나라가 왜 제사를 제해 버리고 성소를 헐어 버립니까? 제사나 성소는 국가 발전에 하등에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제사나 성소가 없이도 얼마든지 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 나라의 방식입니다. 힘이 안되는 쪽은 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나 개인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속성은 나 개인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힘이 안되는 것을 거부하는 그 속성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물론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대로 할 때입니다. 이럴 때 신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방해되지 않는 쪽으로 고쳐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허무는 것입니다. 힘이 안되고 오히려 손해가 되는 쪽은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대부분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는 쪽으로 삭제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왜 신자들이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꺼려하고 귀찮아합니까?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세상 사는데 이익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피곤한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들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임도 적당한 선에서 끊어버립니다. 내 마음이 가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만 참석해도 신앙은 얼마든지 지킬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여기에 뭔가를 더 추가하는 것은 자기의 삶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예배를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 기본적인 것만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느냐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중심보다 왜 자기 사업중심, 직장중심으로 움직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요구하고 명령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13절에서도 강한 나라에 의해서 성소와 백성이 짓밟히는 일이 어느때까지인가라고 말할 때 이천 삼백 주야라고 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고 합니다. 강한 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제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 날은 길지 않습니다. 신자는 마지막을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세상 힘을 얻기 위해서 살고자 힘쓸 때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자기의 인생을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게 산다고 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이익을 따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