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짐 (단 8:15-27) - 30강

사람들이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 때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는 세상의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자기의 삶을 주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라지고 썩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권력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아부를 할 때 그 권력자가 내일이면 그 권력에서 물러갈 사람이라면 지금 아무리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다음 권력자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끝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자기의 모든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세상이 끝난다고 하는 긴장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선 눈앞에 있는 행복과 기쁨에 더 관심이 있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도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긴장감도 없는 것입니다. 벼락이 칠 때 나무 밑에 있지 말라는 인간의 지식은 믿고 조심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의 말씀은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마지막 때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마지막 때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어져 버릴 것에 인생의 모든 목적을 걸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오히려 신자들이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하늘의 소망이 없는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운 것입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면서도 마지막을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마지막을 보며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모든 욕심과 소망이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입니다. 25절을 보면 "그가 꾀를 베풀어서 제 손으로 궤휼을 이루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안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지금 강한 나라가 자기 꾀로서 세상을 살아가며 스스로 '나는 크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손이 아닌 다른 분, 만왕의 왕에 의해서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강한 나라의 모습은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모두 자기 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말씀에 지시를 받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성공을 위해서 자기 꾀를 발휘하고,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온갖 궤휼을 다 쓰면서 남에게 해가 되든 말든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말씀은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뭔가 상황이 어려울 때는 슬며시 놔버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람의 손이 아닌 만왕의 왕이신 분에 의해서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깨어진다는 것은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삶의 목표가 세상 쪽에서 주님 쪽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어떤 황홀한 체험이 있고 놀라운 기적이 있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깨어짐이 있을 뿐입니다. 천사를 만난 야곱이 깨어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깨어지듯이 주님을 만난 자는 깨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님 때문에 애매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죽거나 고통을 당한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 스데반은 주님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바울은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구약에 선지자들도 주님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주님 때문에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만남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주님과의 만남을 내가 깨어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주님을 만나면 신앙이 저절로 좋아지고, 신앙의 신비로운 체험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운명이 우리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흔적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자로서 세상은 심판 속에서 다 사라질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오히려 세상에 소망을 두는 모습을 보여주고, 세상 것에 욕심을 둔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것은 주님을 만난 자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보와 타협이 없는 것이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는 세상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을 멸망 받을 소돔과 고모라로만 볼뿐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세 친구가 풀무불에 들어간 것은 말씀대로 살려다 보니까 주어진 열매입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오해받는 것을 무서워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을 무서워할 때 양보와 타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27절을 보면 다니엘이 말씀을 듣고 나서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말씀이 자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정한 때 끝에 되어질 일이 다니엘에게 큰 충격의 말씀이 되었던 것 같이 신자에게도 마지막 때 되어질 일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을 깨달은 것에 대한 충격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살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조그만 일 때문에 근심하면서 마음졸이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에 의해서 깨어지고, 주님을 만난 자로서 세상에 양보하지 않고 언제나 마지막 때를 마음에 두면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