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단 9:1-6) - 31강

사람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남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 뿌듯해 하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줬을 때입니다. 도움을 받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것도 모두 힘과 연관이 있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이고, 힘이 있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 자존심 상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데 대한 수치감이 앞서기 때문이고, 마음이 뿌듯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하게 도움을 받아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용서를 받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그 힘을 믿으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을 은연중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군가의 도움 때문이라고 하면 자기의 자랑의 근거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데 반대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살 수 있다고 믿다가도 점차 살아가면서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니엘서에서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메데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왔으며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친다는 말씀의 70년이란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다니엘서의 장의 순서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뭔가 순서가 뒤바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1절을 보면 다리오 왕의 원년, 즉 다리오가 왕으로 세움을 입은 첫해에 깨달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다리오 왕은 이미 6장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때 6장과 9장의 순서가 뒤바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순서가 뒤바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다니엘의 깨달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굳이 순서가 뒤바뀐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같은 의미의 사건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있지만 이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9장이 순서상으로 5장 뒤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장 뒷부분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본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장 뒷부분의 이야기는 벨사살 왕이 잔치를 할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쓴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달아봐서 부족한 인간은 끝내버리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자기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이 교만으로 인해서 짐승으로 일곱 때를 지낸 것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기명들로 술잔을 삼아서 잔치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벨사살을 끝내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손가락의 글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는데 그 약속이 그날 밤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5:30절에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예레미야에게 하신 70년의 약속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70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가고 예루살렘은 70년간 황폐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 거룩한 곳이 황폐해지고, 성전이 무너진 것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데 그것은 70년이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뭔가를 잘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한 기간이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있는 동안 거룩한 땅인 예루살렘이 70년간 황폐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무엇인가가 고초를 당하고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70이란 숫자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짐승이 되는 징벌을 받은 느부갓네살은 짐승으로 지내는 기간이 일곱 때였습니다. 7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날수로서 인간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느부갓네살이 교만한 인간에서 하나님을 아는 인간으로 변한 것은 7년의 기간이 지나서인데 그 7년이란 숫자는 '느부갓네살을 변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띠라서 70년이란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짐승같이 만드셔서 하나님을 아는 인간으로 만드신 것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새롭게 달라지는 기간이 바로 70년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했던 이유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이유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에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성전 되신 예수님이 무너지신 것입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회개는 '나는 심판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인데 심판이 나 아닌 다른 거룩한 분에게로 떨어지고 나에게는 심판 대신 긍휼과 자비가 주어진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주의 말씀과 주의 법에 마음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이 회개한 후의 모습입니다.

회개는 깨닫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나 때문에 다른 거룩하신 분이 무너지고 부서졌다는 것을 깨닫는 자만이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반성이지 회개는 아닙니다. 반성은 회개와 다릅니다. 회개는 '나는 도저히 가망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는 고백인데 반성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못했습니다'는 뉘우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 때문에 심판을 받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약속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약속만을 의지할 때 세상의 고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민이란 모두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지막 때의 약속을 아는 신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신자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민하고 불평하는 우리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달리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상관이 없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말씀으로 들어 왔다면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