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과 사유 (단 9:7-10) - 32강

교회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면서 기도를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했을 경우입니다. 신자는 기도에 대해서 많은 조심성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는 기도라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에 대해서 조심성을 가져라고 말씀 드리는 것은 기도를 단지 종교 행위로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의 기도와 지금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없다고 봅니다. 다르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됩니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계명에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은 이방 신들의 이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애굽인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이, 이스라엘이 여호와란 이름을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부른다면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기도는 이방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못박아 두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기도를 단지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면서 뭔가를 구하는 행위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다니엘의 기도를 보거나 그외 성경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의 기도를 보면 지금 우리들의 기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신자들의 기도를 보면 바리새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자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갈 때 자기의 죄악된 면을 발견합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께 할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의 문제가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믿음으로 살 수 없고, 구원과도 상관없게 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와주실 것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함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될 문제가 오늘 다니엘의 기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잠시 후에 이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들은 기도를 생각할 때 언제나 방법적인 문제를 앞세웁니다. 즉 기도의 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내용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내용까지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기도의 내용은 내가 미리 정하여 놓고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기도한 사람들을 볼 때도 '그들이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보지 않고 '그들은 기도를 어떻게 했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것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강조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가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을 가지고 철야기도를 강조합니다. 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하면서 식사 감사기도를 가르치는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가지고 산상 기도회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물론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산상기도, 이런 것들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문제는 한국교회는 이것을 '나 기도했다'라는 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들이 소위 응답 받는 능력있는 기도인줄로 알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흔히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기도에 더 힘이 있다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힘으로 밀어붙이자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예배당에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힘을 모으자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라는 것을 함께 기도할 때 느끼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다니엘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다니엘이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응답을 받았느냐'입니다. 기도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응답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의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을 기도하여 받아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간증할 때도 응답 받은 것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시더라'를 말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간증한 사람이 말한 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도 응답을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13절을 보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은총은 무엇입니까? 9절에서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라고 말하는 대로 긍휼과 사유하심이 여호와의 은총입니다. 결국 다니엘은 긍휼과 사유하심이라는 여호와의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신들이 여호와의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다니엘은 죄를 고백하고 나서 용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들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즉 다니엘은 응답을 이미 받은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도 다니엘은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이 역시 주의 분노가 떠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을 아는 가운데 이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과 사유하심을 아는 가운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을 이미 받은 가운데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고 나서 '이제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지 그때까지 기다리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어떻게 하셨다는 것까지 다 알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응답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하게 된 것은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달은 후입니다. 다니엘은 이 약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유하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오면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은 주어져 있었는데 그 은총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 자기들의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죄를 고하고 용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용서의 은총이 주어져 있음을 알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은총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사람은 모두가 자기의 형편과 환경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죄도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란 국가에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 즉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벧전 2:5에서도 우리를 향해서 제사장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자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보여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총에는 관심이 없이 어떻게 하면 힘있는 나라가 되느냐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우대 받고,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무시당하고 천대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지는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는 사람은 우대를 받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모습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외모를 보고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율법을 어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유하심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움직이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어긴 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현재 자신의 모습과 환경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돈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서 자신을 대하신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백성으로 여기신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어떤 대우를 받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께 어떻게 보여지며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말씀 안에서 자신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올 때 이미 하나님의 긍휼과 사유하심이 주어진 상태에서 포로 되었음을 발견하고 그 은총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은총을 구하지 않았던 자신들을 회개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긍휼을 훼손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계급을 만들고, 서열을 만들고, 우열을 따지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남들 앞에서 내세우고 칭찬을 하는 것이 긍휼과 자비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고서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긍휼과 사유하심으로서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가는지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