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기도 (단 9:11-19) - 33강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부탁을 다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들어보고 그것이 부모의 입장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될 때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모두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신다고 약속을 해놓고 신자가 기도하기만 기다리시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요구도 기도만 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기준을 정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의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확인해 봐야 합니다.

신자가 기도한다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모두가 나 개인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 개인에게 유익이 되는 문제에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시키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의 육신에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포기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수는 없고 결국 내가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 가지고 있는 문제를 포기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리의 관심과 동일한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의 관심사, 소원과 반대되는 부분은 모두 삭제해 버리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판 예수 핍박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꼭 교회 다니는 신자들을 괴롭히고, 예배를 방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교회를 안다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교회에서 무시당하고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신자들을 통하여 부정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를 무시하지도 않고 핍박하지도 않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쓸데없는 걱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걱정하는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염려되고 근심되고 고민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문제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대부분입니다.

신자들이 하는 걱정 가운데는 교회에 대한 걱정이 있습니다. '교회가 약하다' '교회가 힘이 없다' ' 새벽기도를 안나온다' 등등 교회에 대한 걱정에는 수없이 많은 걱정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신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 수가 줄어들고, 헌금이 덜 나오고, 교회 분위기가 침체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걱정이고,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주님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주인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책임은 주님이 지십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 책임은 인간 자신이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인 다니엘의 기도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칠십년 동안 예루살렘이 황무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난 후에 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다니엘의 충격을 주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 하여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이한 점입니다. 이방 나라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왕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정치를 해 나갑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는 많이 번성하고 힘을 길러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오고 예루살렘이 황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오늘 본문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진행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스리면 안됩니다.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목사가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분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시하십니다. 때문에 신자는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왕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든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만 바라고 살뿐입니다. 걱정 근심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면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바라보면서 주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