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이레 (단 9:20-27) - 34강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슬픔 고통이 없이 기쁨만 계속되는 삶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픔 고통은 멀리하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적인 죄인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슬픔 고통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화와 복을 주관하신다는 신을 자기 나름대로 선정해서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입니다. 종교는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모습은 한결같이 인간의 정성에 따라서 슬픈 일, 고통의 일을 물리쳐 주는 일을 담당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해결하는 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이 주어지게 되었는가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이 있는 것은 세상 자체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저주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절대로 기쁨이 될 수 없고, 세상에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고통이고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저주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을 때부터입니다. 죄없는 자로 창조 받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사탄의 유혹을 따라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후로 인간은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자신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세상의 삶이 슬픔이고 고통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한탄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내가 이렇게 슬퍼하고 고통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니엘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가브리엘이 나타났을 때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도 가브리엘이 그 소식을 마리아에게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다니엘에게는 기쁜 소식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다니엘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칠십 이레라는 말이 나옵니다. 칠십 이레는 490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시간적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칠십 이레란 인간이 죄문제를 해결할 대까지 고생하며 사는 기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은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기쁨을 주신다면 한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슬픔과 고통에 살게 하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하기 전에 인간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다면 저주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축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죄의 해결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24절에서 말한 때로 기름 부음을 받은 지극히 거룩한 자에 의해서 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은 이분에 의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복으로 연결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하신 분의 죄 용서를 알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분에 의해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저주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오직 복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편안하게 살아도 슬픔과 고통은 여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여건이 인간을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해결한 사람은 어떤 환경이나 여건도 고통의 도구가 되지 않고 그 안에서 오히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될 대까지 인간은 고통과 슬픔의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를 칠십 이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9:2을 보면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만에 마치고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되는데 그것이 70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서책을 통해서 다니엘이 알게 된 것입니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서 살아야 하는 고통의 세월입니다. 그것이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가 영원히 끝나는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칠십 이레라고 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자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거룩한 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으신 거룩한 분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데 그전까지는 세상에 붙들려 있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칠십 이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거룩하신 분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그분을 만나기까지를 칠십 이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것같이 그 안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이레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거룩하신 분을 만났느냐입니다. 그분을 만나야 죄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교회를 다니며 열성적인 행동을 보여도 죄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칠십 이레는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와 한 이레로 나누어집니다.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를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로 말합니다. 처음 일곱 이레는 처음에 성전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겠다고 결정하고 나오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 붙들려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을 우리 안에서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것을 한 이레로 말합니다. 결국 한 이레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삼고 소망으로 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분이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의 말씀은 '너희의 힘을 믿지 말고 대신 피흘린 자를 믿으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아무리 주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우리는 고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고통이 전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때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삶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셔서 피를 흘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치고 영원한 기쁨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칠십 이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