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전쟁 (단 10:1-9) - 35강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욕구라는 것이 있는데, 종교적인 욕구라는 것은 자기의 종교를 통해서 종교성을 발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를 할 때도 그냥 혼자서 묵상으로 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재미가 없고 기도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멀리 기도원을 찾아가거나 부흥회를 통해서 그러한 기도에 대한 욕구를 발산시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종교적인 욕구를 교회가 적당하게 발산시켜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당장 '교회가 재미없다, 교회가 은혜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종교적인 욕구를 적당히 채워주고 발산시켜줄 교회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한 번 찾아온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붙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종교 형태가 무엇인가를 연구해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교회는 커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은 교인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흥미를 통해서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붙들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성공담이나, 목회 전략이라는 것, 또는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복음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 키워주는 것은 모두 복음이고,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는 결론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참된 복음은 사라지고 거짓된 복음만이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사탄이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지 않고, 재정이 늘어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곧 주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고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이 됩니다.

본문은 다니엘이 자기가 이상 중에 본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힛데겔이라는 강가에서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를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본 이 분의 모습을 본 자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6을 보면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통해서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모습은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서의 인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즉 사도 요한이 본 모습은 심판주의 모습이고, 따라서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모습도 심판주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에게 심판주의 모습을 보이셨느냐가 궁금한 점입니다. 1절을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깨달으니라"고 합니다. 큰 전쟁이라는 것은 다니엘 8장에서 다니엘이 이상으로 본 수양과 수염소의 전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뿔 가진 수양은 메대 바사를 가리키고 수염소는 헬라를 가리키는데 메대 바사가 헬라에 의해서 망하는 것을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다니엘은 무서워 한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가 헬라에 의해서 멸망당한다는 것이 근심되었던 것입니다. 입맛을 다 잃어버릴 정도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다니엘에게 심판주의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에게 근심하지 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당하는 일가지고 무서워하고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일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믿음이 없습니다. 조그만일 가지고도 세상을 다 산 것처럼 한숨을 쉬며 걱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일이 다 하나님의 주관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장차 주어질 나라에서 얻을 승리가 약속된 인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삶이 주어져도 괜찮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남에게 져도 괜찮은 것은 영원한 승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꾸 영원한 것을 제시하시는데 우리는 기껏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시한 세상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근심 걱정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란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주어진 환경과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내쪽에서 원하지 맙시다. 내쪽에서 결과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을 들고 나오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떤 일이든 그 일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은혜를 깨달아 가기를 소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시시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영원히 존재하는 귀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지고, 오직 주님께 속한 것만이 남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죄악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담대한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는 주님의 권세 앞에 무너질 운명입니다. 주님 권세 외에 그 어떤 권세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평안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상을 깨달은 다니엘이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평안이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