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자 (단 12:5-13) - 40강

오늘은 다니엘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다니엘서를 강해하면서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 중요한 주제는 세상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해버릴 세상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세상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세상의 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질 때도 뭔가 확실한 것에 희망을 두고자 합니다. 세상의 것은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확실성을 두고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확실성을 두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도 아니며 세상과 같이 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 것만 있으면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님이 필요치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마지막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왜 꼭 망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마지막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망해야 한다는 것은 간단합니다. 죄때문인데 그 죄가 무엇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보시기에 좋더라'는 것은 천지창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음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그 처음 모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때문에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원하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없애버리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다른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신 처음 창조된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천지만물들이 하나님이 원하신 모습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처음의 모습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처음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고, 없다고 해서 불평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이 지금 있게 한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처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나아감으로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신 모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면 그것을 은혜로 알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두고 보실 수 없을 때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것만큼 칭찬하시겠다는 분이 아닙니다. 단 하나에서 잘못돼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은 버리시고 영원한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버리시고 영원한 나라를 만드시는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3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중 두 사람은 강 이편과 저편에 서 있고 한 사람은 강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7장을 보면 바다에서 4짐승이 올라옵니다. 그 짐승들은 바다에서 땅으로 올라와서 세상을 지배하고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그런데 그 핍박이 한때, 두때, 반때 동안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한때, 두 때, 반때란 3년 반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성도는 3년 반동안 세상에 의해서 핍박을 당해야 합니까? 다니엘도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8절에 그 일을 다시 되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9-11절의 말씀을 하는데, 그 말씀도 여전히 뭔가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11절을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제사를 폐하고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우상을 섬기도록 핍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1290이라는 것은 약 3년 반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때, 두때, 반때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성도가 3년 반동안 세상의 세력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여기서 3년 반의 의미가 무엇이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1:9절을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일이 일어난 장소는 8절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사흘 반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신 기간인데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쉴 때까지, 즉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사흘 반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 있을 동안에 어떤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느냐면 마귀의 세력이 지배합니다. 그 기간을 사흘반, 또는 한때, 두때, 반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기간 동안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의 세력에 의해서 핍박당하고 고통을 겪게 되어있음을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성도가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그것은 성도를 핍박하게 하고, 공격하게 함으로서 마귀의 세력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모두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때 천국에 들어가는 복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기다리는 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 때문에 올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마지막 때를 바라보면서 참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결국 복있는 자였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망합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옳았다는 것은 마지막 때에야 증명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그때를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사람이 복있는 자입니다. 이것은 현재에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서야 세상에 증명되는 것입니다.